일상의 변주를 응원하며
일상의 변주를 응원하며
  • 승인 2018.08.20 21: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현숙 시인
24절기는 지혜를 가진 시계 같다. 그 어떤 계절도 절기 앞에선 백기를 드는지 기세등등하던 폭염의 낯빛이 조금은 달라짐을 느낀다. 말복의 아침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도 몸이 가난한 사람에게도 가을은 곧 오리라. 이미 가을이 신호탄이라도 쏘아 올려 보낸 것이었을까. 폭염의 등줄기 위로 소나기가 쏟아져 내렸다.

오랜 기다림 끝에 내리는 시원한 바람을 느끼고 싶어 풀룻 레슨을 간다는 딸아이를 따라나섰다. 근처 카페에서 차 한 잔을 받아놓고 도서관에서 빌린 e북을 들여다본다. 그 때였다. 건장한 남자 셋이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테이블이 네다섯 개 정도 밖에 안 되는 좁은 카페 안이 일순간 들썩 거렸다. 그리고 마침 비워져 있는 내 옆자리로 와서 풀썩 주저앉았다. 술 냄새가 확 풍겨져 온다.

“도대체 머하는 사람들이람. 예의도 없이. 더군다나 하필 바로 옆자리라니”

눈살을 찌푸리는 나를 아랑곳 않고 자리를 찾아 앉던 한 남자가 말문을 연다.

“저도 억수로 힘들어예. 물려줄 재산도 없고 어디 기댈만한 든든한 언덕하나 가지지 못했지만 그래도 우짭니까. 한 푼이라도 벌어보겠다고 밤늦도록 식당일하는 마누라하고 새끼들 봐서라도 열심히 살아야 안 되겠습니까. 그래도 밥은 먹고 사니 제 걱정은 안 해도 됩니더. 집에 가시거든 암말 말고 게좌번호나 바로 찍어 주이소. 그라마 됩니더. 알았지예.”

나는 슬쩍 그 사내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내 남편과 비슷한 또래의 오십 중반을 훌쩍 넘은 나이로 보였다. 목소리는 차분했으며 말끝마다 따라 붙어 나오는 웃음소리는 소탈한 듯 보였다. 그가 구사하는 단어와 문장들 속엔 뚝배기 같은 투박한 삶들이 베어 나오고 있었다. 듣고 있던 또 다른 한 사내가 말을 보탠다.

“그래도 그라면 안되지예. 최소 5부 이자는 쳐 줘야 안되겠어예.”

그 말을 받아든 사내가 멋쩍은 듯 연이어 말을 이어 갔다.

“이자 같은 건 필요 없심더. 대신 잘되면 소주나 한 잔 사 주이소예. 혹시 돈이 잘 안 되더라도 먼저 인연을 끊는다거나 그라지는 마이소. 우리가 맨날 없이야 살겠습니꺼. 돈이야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고 그런 거지만 사는 내내 괜히 못 갚은 돈으로 인해 마음의 빚까지 짊어 져서야 되겠습니꺼. 그기 걱정돼서 그랍니더.”

돈을 빌려 받는 사내는 한마디 말도 없이 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진짜 소주 한 잔이면 족합니더. 이자는 열심히 사는 걸로 하입시더. 그게 의리 아니겠어예. 제게는 당장 급하지 않은 돈이니 일 년이든 십 년이든 천천히 원금만 갚아 주면 됩니더. 천만 원이 일억이 될지 십억이 될지 우예압니꺼. 사람일은 모르는 거라예. 당장 힘들어 곧 죽을 것 같아도 살다보면 어느 구름에 비가 들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라예. 절대.”

그들의 대화를 엿듣는 동안 나는 행복해졌다. 더위가 썩 물러난 듯 가슴 안으로 시원한 바람이 드나들고 있었다.

돈을 빌리는 사내가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앉아있었지만 이 순간만을 잊지 않고 삶의 변곡점마다 열심히 다시 살게 하는 이유가 되었으면 좋겠다.

소주 한 잔의 이자만으로도 족하다는 사내도 그런 인연을 곁에 둔 복 있는 사내도 서로가 서로에게 돈 잃고 사람까지 잃게 되는 짐을 지지 않기를 바라며 카페를 나섰다.

바닥을 향해 내리꽂히던 소나기가 그쳐가고 있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많이 본 기사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