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하루를 위한 변론
어떤 하루를 위한 변론
  • 승인 2018.08.27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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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한 탓에 이리 된 일, 지금 밤이 되어서야 깨닫는 거지만, 오늘도 종일 그를 만나지 못했다. 바삐 출근을 해야 했고 내내 건물 속에만 머물러야 했기에 그랬다. 새시창이 달린 고층빌딩이라 더욱 그랬고, 전화와 메시지가 자주 와서 자리를 뜰 수가 없었고, 가끔씩 이 방 저 방을 돌아다녔어도 그건 어디까지나 일과였기 때문에, 벗어날 짬이 없었다. 오후부터는 조금 지쳐 있던 탓에 그저 무심히 퇴근 시간을 기다리며 두통과 초조를 달랬었고. 행여 무슨 바람이 나서 예전과 다소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은 기실 가당치 않았다. 바람이 불어오면 그도 틀림없이 꽤나 내 소식이 궁금하여 고개를 높이 쳐든 채로 두리번대며 바람결에 갸웃갸웃했을 거다. 혹여 향기에도 눈이 있다면 창문마다 블라인드 틈새로 기웃대었을 거다. 그때 나는 대개 고개를 숙인 채 서류더미를 뒤적이고 있었거나, 마우스를 쥐고서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거나, 가끔씩은 한 손으로 커피를 훌쩍이고 있었거나, 누군가에게 서류를 내밀며 머리를 조아렸거나, 때로는 오른 손을 흔들며 아니라는 표를 하였을 게고, 아주 간혹 왼손 엄지와 검지로 안경을 바로 잡다가 미간을 누르며 뒷머리를 두드리기도 하였을 거다. 식당에 갔을 때도 있었고, 가끔 화장실에 갔을 때도 한순간조차 떠올린 적 없었다. 퇴근길에도 무심히 승강기로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와 차를 타고 도심의 가도를 지나왔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고, 아파트에 도착해서는 다시 지하주차장에다 파킹을 한 다음 다시 승강기로 올라왔으니, 또 그럴 수밖에 없게 된 일이었다. 예전처럼 생각하면 그가 종일 풍겨냈을 그 향내들은 바람결에 실리어 세상의 공중에 퍼져나가며 끝없이 흐르고 있을 테고, 서리가 곧 내릴 것 같은 새벽까지 빌딩 옆 작은 화단 모서리에서 뿌리를 묻고서 내내 환한 얼굴 그대로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 게다. 어쨌든 뒤늦게라도 알게 된 거지만, 그의 기다림 안에 모든 게 들어 있었던 것, 하지만 그날은 이미 내가 없어서 또한 그가 없이 지나간 하루였다.


◇조기현 = 대구 출생. 1986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 ‘길들의 여행’.


<해설> 화자가 겪은 소소한 일상을 방관자적 관점에서 과감 없이 서술한다. 한데 그 일상의 내부와 내면에도 그가 없다는 필연적 과점이 돋보인다. 우리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들이 때론 평범하지 안 듯 그 서술적 의미망에서 또 다른 고뇌의 흔적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제왕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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