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정류장에서
버스정류장에서
  • 승인 2018.09.03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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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태풍 솔릭에 잔뜩 움츠리고 긴장했던 마음을 내려놓자마자 요 며칠, 집중호우에 불의의 일격을 당한 기분이 든다. 페스트리 빵처럼 겹겹이 감싸고 있던 구름들의 색깔이 대낮임에도 어두침침한 하늘을 만들어내고 있다. 계절이 가고 오는 사이, 약해지고 위태로워진 곳은 없는지 마음의 균열이 커진 자린 없는지 뒤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했다.

내 안의 다른 나와 화해하고 싶은 날이면 대문 밖을 나와 천천히 걷는다. 공원을 돌아 나오며 잠시 쉬어가고 싶어 버스정류장에 앉았다. 몇 대의 버스들이 오고 가는 동안 그곳에는 낯선 할머니와 나, 단 둘 뿐이었다. 연신 흐르는 땀을 닦고 있던 내 눈치를 몇 번이나 살피시던 할머니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뭔지 모를 슬픔 같은 것이 전해져 왔다. 왠지 모른 체 하기가 어려웠다. 무슨 예길 하시던 간에 그냥 들어 드리고 싶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팔십까지만 살다 갔으면 딱 좋겠어요.”

정류장 안으로 바삐 걸어 들어오시던 노신사 한 분이 할머니를 힐끗 노려보시더니 상기된 얼굴로 할머니를 향해 되물었다. 붉은색 니트 카디건에 물이 잘빠진 청바지를 입고 머리엔 카키색 배래모를 눌러쓴 멋진 분이셨다.

“뭣이요. 몇 살이라고요?”

“난 팔십 여든인데 그럼 벌써 갔어야 하는 게 옳다는 말씀인지….”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물음에 들은 척도 않으시고는 혼잣말처럼 대내셨다.

“늙으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니 말이지요. 어딜 가도 거치적거리는 짐짝 신세인걸요. 죽지도 않고 그조차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니….”

할머니는 해만 뜨면 집에서 나와 딸 내 집에서 낮 동안 놀다가 해가지면 며느리 집으로 주무시러 가신다고 했다. 아들 집이 아니라 며느리 집이란 말 속에 쓸쓸함이 베어 나왔다. 종부로서 대를 끊어놓을 수 없어 아들 하나 낳으려고 위로 내리 딸을 다섯이나 낳으셨다고 한다.

청상과부로 육남매를 키우시느라 재래시장에 양말을 팔러 다니셨단다. 그렇게 몸이 망가지는 줄도 모르고 바쁘게만 사셨는데 나이가 들어보니 아무리 써도 줄지 않는 늘어진 시간이 감옥살이 같단다.

“양말 그기 개급어도(가벼워도)돈은 되었지예. 지금이야 에레베타(엘리베이터)도 있고 그깟 짐쯤이야 옮기는 일이 식은 죽 먹기겠지만 옛날엔 촌동네로 도시 뒷골목으로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찾아 댕길라카면 얼마나 힘들었던지 말도 안 나와예. 좁기는 얼마나 좁고 계단은 또 얼마나 많은지 더군다나 가파르긴 또 얼마나 가파른지 말로는 다 할 수 없어예”

가끔, 할머니의 무거운 짐 보따리를 누군가 들어주겠다며 손이라도 내밀면 전 재산 같은 양말을 들고튀기라도 할까봐 얼마나 전전긍긍 하셨던지 지금까지도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하셨다.

자식이 아픈걸 보는 일은 부모에겐 형벌일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특히 명절이면 아들이 하나뿐이라 며느리가 치러야할 손이 많다며 며느리보기가 미안하다고 하신다. 다섯 명의 딸들과 사위에 손자 손녀까지 할머니를 보겠다고 모두 아들네로 몰려오니 이젠 찾아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신단다.

혼자 있고 함께 있고의 문제가 아니라 소중한 것들을 공유할 수 없어 쓸쓸했던 날들처럼 내가 소중하다고 믿는 것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지 못해 고독해도, 나이 들어간다는 것이 제 몫만큼의 세계와 다시 조우하고 화해하는 과정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어쩌면 살아오신 날들이 고통스러운 것만은 아닐 것이다. 홀몸으로 치열하게 살아오신 할머니의 삶이야말로 잘 성장한 자식들을 통해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방식일 뿐, 누군가는 그 삶을 존중하고 알아줘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정류장에서 만난 낯선 중년의 나를 향하여 자신의 삶의 이력을 담담히 풀어내는 동안 나는 이미 내 안의 또 다른 나와 화해를 하고 있었다.

들어줘서 고맙다는 말을 남기며 버스 계단을 오르는 할머니의 발걸음이 순간 휘청거렸다. 내 맘도 따라 휘청거렸다. 환승을 준비하는 정류장처럼 나는 오래도록 다가올 삶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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