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단상(斷想)2-어느 가을날
여행 단상(斷想)2-어느 가을날
  • 승인 2018.09.05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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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국 (수성아트피아 관장)



여행이라 하면 준비도 많이 해야 하고 시간과 경비도 적잖이 들기에 다들 그 기대만큼 부담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약간만 생각을 달리하면 큰 부담 없이 다양한 여행을 즐길 수 있다. 나의 여행 콘셉트는 일상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느끼기 위해 마음 편히 다녀올 수 있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 집 가까운 곳(동네 한 바퀴보다는 조금 더 먼---)을 다니면서 여행의 맛을 느끼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여행의 백미는 길을 떠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틈나는 대로 집을 나선다. 다만 쫓기지 않고 그야말로 유유자적하고 싶다. 그래서 세운 나름의 원칙이 혼자서, 가능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그리고 많이 걷든지 아니면 한곳에 머무르며 조용한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여행이다. 그렇다고 해서 늘 혼자만 다니는 것은 아니고 가족들 또는 여럿이 어울려 하는 여행도 즐긴다.

몇 해 전 어느 가을날 길을 나섰다. 동대구역에서 오랜만에 무궁화호를 타고 불국사역으로 향했다. 걸리는 시간은 1시간 반 정도, 요금은 5,700원. 이 가격은 아직도 그대로다. 어린 시절 시골 외갓집이나 타지로 갈 때면 버스, 기차 모두 완행을 이용했고 멀리 서울 쯤 가야 타는 것이 좀 더 빠르고 편한 기차 무궁화호였다. 그리고 특별한(?) 경우에나 탈 수 있던 것이 새마을호다. 요즘은 대부분 고속열차를 이용하다보니 그저 빨리 이동하는 것에 만족하게 된다. 어쩌다 창밖을 쳐다봐도 그저 먼 산이나 바라보게 된다. 그마저도 대부분 창 가리개를 내려놓아 밖을 내다 볼 수도 없다.

무궁화호에서 바라보는 가을 풍경은 매우 다르다. 속도도 훨씬 늦고 고속철로 주변처럼 차단 시설이 별로 없어 지나가는 주변의 나무들이 손에 닿을 듯하다. 가을빛에 물들어가는 나뭇잎의 색깔들이 너무나 선명하게 보인다. 천천히 스쳐 지나가는 시골마을들도 평화롭고 정겹게 다가온다. 정차하는 역사들의 단정하고 정갈한 모습들을 찬찬히 지켜 볼 수 있는 것은 덤이다.

불국사역에 도착했을 땐 마침 점심시간이라 ‘갈비랑 국수랑’이라는 식당이 눈에 들어온다. 잔치국수에 돼지갈비까지 5천원이다.(지금은 천원 올랐다) 약쑥계란이 테이블마다 쌓여져 있어 알아서 먹고, 나갈 때 계산하면 된다.

역에서 불국사까지 걸어서 3~40분이면 가지만 도중에 여기저기 기웃거리다보면 한 시간쯤 걸린다. 단풍이 들 무렵엔 어디든 아름답지 않겠냐만 색색의 단풍과 불국사 경내 석축, 돌담의 조화가 절간답지 않게 화려함의 극치다. 특히 불국사 초입의 조그마한 연못에 비치는 하늘과 곱게 물든 가을 나무는 바로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색의 향연이다.

불국사를 나서서 토함산을 오른다. 산을 오르다 보니 비가 오기 시작하지만 날이 궂으니 더 좋다. 좌우로 늘어선 소나무의 향이 훨씬 짙어진다. 적당한 경사의 산을 오르노라니 제법 땀이 나고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그때쯤 어디선가 종소리가 은은히 들린다. 석굴암 주차장에 위치한 대종 소리다. 이정도 거리만 걸어도 충분하기에 발걸음을 돌린다. 게다가 눈 호강까지 했으니 만족하며 이제 맛있는 저녁 메뉴를 고를 차례다. 불국사 앞 상가를 지나쳐 역으로 곧장 가다가 ‘만리장성’이라는 곳에서 삼계탕에 막걸리를 반주로 해서 저녁을 먹었다. 식후 비 내리는 어두운 밤길을 걷노라니 을씨년스럽긴 하지만 또 그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

한적한 불국사 역 대합실, 여대생으로 보이는 아가씨 두 사람만 있다. 올 때도 생각 했지만 단풍철 휴일에 나처럼 기차를 이용해 여행하는 사람이 많으리라 예상 했는데 전혀 뜻밖이다. 아무튼 고요하니 더 좋다. 비에 젖은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야간열차, 우리의 눈에 익은 정겨운 추억의 장면이 아니겠는가. 노곤한 몸을 의자에 기대 깜빡 잠에 들었다 깨니 벌써 동대구역이다. 저렴하게, 느긋하게 가슴가득 가을의 서정을 담은 나의 어느 가을날 이었다.

누군가 말했다. 자신의 ‘창작의 문을 여는 열쇠 3가지’ 첫째 ; 오롯이 혼자 있는다. 둘째 ; 머리를 비운다. 셋째 ; 여행을 떠난다. 나는 혼자서 느긋하게 떠나는 여행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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