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우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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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9.09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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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된 원더우먼 린다 카터를 텔레비전에서 보았을 때, 어머니 생각이 났다 학교에서 돌아와 가방을 팽개치면 텔레비전이 있는 마당집에 모여 별무늬바지의 원더우먼을 만났다 무적의 원더우먼, 게다가 글래머라니! 어머니는 하루 종일 밭일을 하고 돌아와서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밥을 안치고 마당에 난 풀을 뽑고 밥을 푸고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빨아 달빛에 널고 뚫어진 양말을 다 깁고 잠깐 적의 공격을 받은 양 혼절했다가 새벽 닭이 울면 일어나 밥을 안치고 들에 나가 일을 하고 밥을 하고 일을 하고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밥을 하고 그 많던 왕골껍질을 다 벗겨서는 돗자리를 짰다 린다 카터는 할머니가 되어 새로운 캐릭터를 부여받아 누추하게 늙어가는 원더우먼을 면했다 원더우먼은 젊고 싱싱한 더 그럴듯한 가슴과 눈웃음을 가진 우먼으로 대체되었다 무기는 더욱 강력해지고 그 사이 새로 생겨난 영웅호걸들과 어울려 술 한잔 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의 어머니는 여전히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약을 먹고 밥을 하고 냉이를 캐고 약을 먹고 콩을 고르다가 밥 때를 놓쳐서 아버지에게 된통 혼쭐이 나고 돌아앉아서 약을 먹고 이렇다 할 전투를 치르지도 않았는데 끙끙 앓으며 잠을 잔다 무릎과 입 안에 새로운 무기를 장착하긴 했는데 별 효과가 없다 전동으로 움직이는 슈퍼카를 구입했지만 슈퍼맨을 만나기는커녕 평생 웬수 아버지와 산다 린다 카터는 지구야 어떻게 되든 저만 살겠다고 비겁하게 은퇴를 선택했지만 어머니는 아직도 우리의 원더우먼 쭈그렁 가슴이 무너져 내려도 별무늬 몸빼를 입고 혼절한다


◇피재현= 경북 안동 출생. 1999년 사람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 ‘우는  시간’.


<해설> 원더우먼 린다 카터는 가상세계의 영웅일지 모르지만, 종일 밭일 하고, 아궁이에 불 지피고, 밥 안치고, 마당 풀 뽑고, 밥 푸고, 밥 먹고, 설거지 하고, 빨래 빨아 달빛에 널고, 뚫어진 양말 깁는 어머니가 현실세계의 진정한 영웅이라는 역설적인 아이러니가 참신하다.

게다가 린다 카터는 비겁하게 은퇴를 했지만 우리의 어머니는 웬수같은 아버지 때문에 은퇴도 못하고 별무늬 몸빼 입은 채 혼절한다는 현실이 가상하다. -제왕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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