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시론>자연스럽게 고개 숙여지는 권위
<팔공시론>자연스럽게 고개 숙여지는 권위
  • 승인 2010.02.04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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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로 (논설위원)

근대화는 인간이 구속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어가는 과정이었다. 처음에는 종교개혁을 통해 신으로부터 자유를 얻고자 했고 과학 연구를 통해 자연으로부터 자유를 얻고자 했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을 구속하고 있던 것이 다름 아닌 인간 자신이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고대 노예들이나 중세의 농노들처럼 소수의 권력을 가진 인간들에게 지배받고 있던 다수의 인간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에서 변화를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간들이 폭력과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2백년이 넘는 목숨을 내건 치열한 투쟁이 있었다. 권력과 싸우기 위해 혁명 조직을 만들었고 법과 제도를 만들었다. 그들은 마침내 과거의 권력을 무너뜨리고 스스로 권력을 손아귀에 넣어 근대 국가를 세웠다. 새로운 근대 세계의 시민이 되었다. 이때부터 시민들은 과거의 사회질서를 대신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갔다.

우리 사회의 민주화 역시 전통적 권위에 대한 공격에서 시작되었다. 가부장적 권위가 공격의 주 대상이었다. 봉건 유교사상의 핵심으로 지목된 가부장적 권위는 전통 왕조와 임금에게 충성하는 정치적 권위로 확대되었다. 스승이나 상전의 권위에 대한 존경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점차 윗사람에 대한 아랫사람의 복종을 강요하는 사회적 윤리로 자리 잡게 되었다.

어른에 대한 자발적인 순종을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농업공동체의 전통이었다. 오랫동안 한 마을에서 공동체를 이끌어가야 하는 농경문화의 전통 속에서 연장자들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권위는 필수적이었다. 그 권위의 토대는 나이였지만 삶의 경험이 그 권위를 뒷받침하였다.

그들에게 권력을 부여하여 향촌 사회를 지배하는 것이 봉건 왕조였다. 향촌 노인들의 권위는 국가의 지배에서 나오고 그것은 황제 권력을 나누어가지는 것이었다. 가부장적 권위가 근대화 과정에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방해하는 핵심으로 공격받았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현대 사회에서는 강제적 억압을 동반하는 권위를 더 이상 용납 하지 않는다.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모두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권력의 횡포는 여전하다. 권위가 없는 권력은 폭력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 권력의 남용을 막기 위해 법과 제도가 만들어졌지만 그 횡포는 여전하다. 권력은 폭력을 불러오고 권력에 대한 저항이 반복되었다.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는 우리 정치권에서 권위 없는 권력이 가져오는 폭력과 혼란의 참담한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우리 사회에 존경받는 지도자나 어른이 있다면 이러한 갈등의 악순환을 끊어버릴 수 있을지 모른다. 그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파워를 가진 영향력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존경받는 어른이다. 힘과 권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권위를 가진 자가 아니다. 사회적 정의를 굳게 지키고 실천하는 삶을 사는 어른이다. 자신의 야망을 억제하고 스스로 희생하고 양보하는 삶을 살고 있는 분이다.

우리 주위에 그런 분들이 많을 것 같다. 우리가 삶에 급한 나머지 이웃에 그런 분들이 있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스스로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다. 스스로 내세우지 않기 때문에 애써 찾지 않으면 찾을 수 없다. 그런 분들은 사회적 구속을 벗어나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구속하여 이웃을 사랑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고개 숙이기를 강요하는 권력자가 아니라 저절로 고개 숙여지게 만드는 분들이다.

그들은 진정한 권위가 자신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삶에서 나온다는 것을 실천으로 보여준다. 그러한 삶을 살았던 많지 않은 인물 중의 한 분이 고 김수환 추기경이었다. 그분이 돌아가신 지 1년이 되었다. 그분처럼 살아생전에 주위로부터 존경받았던 어른은 많지 않았다. 돌아가신 후에 그를 추모하는 분위기 역시 차분하면서도 진지하다.

고 김수환 추기경과 같은 분이야 말로 진정 권위를 가진 분이 아닐까? 그는 "촛불이 빛을 내려면 스스로 불타야 한다." 라고 했다. 우리 사회가 이처럼 어려운 때를 만났지만 길을 잃지 않고 빛을 찾아 밝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어느 곳에선가 우리를 위해 스스로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는 어른들이 많이 계시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우리를 구속하지 않고 참된 자유를 누리게 하는 희망의 등불이 되어 주었다. 그들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참된 권위라고 내세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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