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가 낳은 서예 거목의 85년 행적 조명
향토가 낳은 서예 거목의 85년 행적 조명
  • 김영태
  • 승인 2018.09.11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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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 출신, 아호는 소헌·봉강
청년 시절 한학과 한의 매진
60대 이후 서단 대중화 노력
작품·일기 방대한 자료 기반
아버지 김만호 아닌
서예가로서 소헌 써나갈 것
서실에서작품하시는모습
1987(80세) 서실에서 작품하는 모습.

소헌 김만호의 예술세계를 찾아서 <1> 아들이 쓰는 소헌의 書道 외길


소헌 김만호(1908~1992)선생은 근현대 한국서예계의 뚜렷한 족적을 남긴 서예가이자 향토가 낳은 서예 거목이다. 선생의 본관은 의성이며 아명은 만술(萬述), 자는 순오(舜五)이고, 시호는 시은(市隱)·만호(晩湖)이며 아호는 소헌(素軒)·봉강(鳳岡)이다. 출생지는 경북 의성군 사곡면 오토산(五土山) 아래 마을이다.

소헌 선생은 한평생 옛성현이 말한 학불염 교불권(學不厭 敎不倦)의 정신으로 우리나라 서예전통과 발전을 위하여 스스로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에 정열을 다했다. 어린시절 동리 어른들은 ‘오토산의 신동’이 났다고 했고, ‘10세전 명필’이라는 소문까지 들었던 선생은 85세 타계하기까지 한학과 한의, 서예를 평생의 과업으로 삼았다. 젊은 시절엔 한의사로서 인명을 구제하고, 60대 이후에는 지역서단의 대중화와 서예의 본원적인 정신성 고양을 위해 노력하였다.

선생은 한학의 정신을 서예에 녹아내고, 널리 인간을 사랑하는 인술을 서예에 투영하며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의 향취와 기운으로 차있는 소헌의 독자적인 서체를 이룩하였다.

특히 선생은 소헌서도론에서 기예보다 심정서정(心正書正, 마음이 바르면 글씨가 바르다)의 요체인 정서(正書)를 강조하였다. 수많은 문하생에게 강조한 것이 비인부전(非人不傳, 仁과 德을 갖추지 못한 자에게 道, 藝, 技를 전하지 않는다)이요 심정서정, 심정필정(心正筆正)이며 서여기인(書如其人, 글씨는 곧 사람이다)이었다. 이는 서학인(書學人)으로서 서법연마와 정신수양의 병행을 선생 스스로 앞서 실천 궁행한 철학이기도 하였다.

선생의 서도에 대한 심정필정, 서여기인의 철학은 한학과 한의학, 그리고 서예의 융복합의 결실로 나타났다. 선생은 한학으로 우주만물의 생성원리와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고, 한의학으로 인본정신을 실천하였다. 서도에 그 두 정신과 실천이 그대로 녹아들어 소헌서도론을 완성할 수 있었다. 선생은 만년에 독창적인 서풍을 보이면서 인서구로(人書俱老, 사람과 글씨가 함께 노련해 짐)의 경지를 보여 주었다. 수(守)·파(破)·리(離)의 경지에서 많은 창작품이 나왔다.
 

우행호시1990
소헌 작 ‘우행호시(1990)’ 소헌미술관 제공

평생을 서예와 함께 한길을 걸으면서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과 정관자득(靜觀自得)의 조형의지는 1990년 그의 나이 83세 때 제작한 우행호시(牛行虎視, 소와 같이 천천히 살펴 걷고 호랑이처럼 예리한 관찰력으로 본다)에 잘 녹아 있다. 유연함 그 속에는 강직함과 정교함이 함께 깔려져 있다. 가히 졸박유려(卒樸流麗, 질박함으로 유려해진 아름다움), 박실색화(樸實色華, 꾸밈없이 자연스럽게 빛나는 화려함)의 독창적 소헌서체의 진수라 할 수 있다.

소헌 김만호 선생의 평전을 집필하기로 결심을 굳히기까지 적잖은 고뇌가 있었다. ‘소헌 선생의 평전을 그 아들이 쓴다는 것이 타당한가’ 에 대한 질문을 꽤나 오래 물고 늘어졌다. 선생의 문하에서 서도의 길을 오랫동안 걸어 온 제자가 쓰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으로 선생의 제자들이 뇌리에 떠올랐지만, 방대한 분량의 자료를 정리하고 체계를 잡기에 힘이 들뿐 아니라 한계가 있으리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또한 평생을 곁에서 지켜본 아들만큼 선생의 일대기를 정확하게 쓸 수 있기도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러 용기를 내어 결국 평전을 쓰게 되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평전을 쓰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자료다. 얼마나 많은 자료를 확보하느냐는 내용의 충실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평전을 객관적 관점으로 이끄는 핵심 요소다. 이 점에 있어 소헌 선생의 평전은 살아있는 사람의 평전을 쓰는 것만큼의 충실도를 기할 수 있다고 자부한다. 평소에 소헌 선생께서 너무나 방대한 자료들을 남겨 놓으셨기 때문이다. 선생은 일기 형식으로 거의 매일의 일상을 글로 남겨놓은 비망록은 물론이고, 평생 쓴 작품과 작품을 쓰게 된 배경, 서도가로서 일획을 그은 사건들에 대한 자료까지 오롯이 후손에게 남겨 주셨다.

그 중에는 역사적인 기록으로서의 가치가 있는 자료들도 있다. 일제 식민통치에서 해방되는 날의 심정, 6.25동란, 3.1운동 기념감상 등을 기록한 글과 자작 한시들이 대표적이다. 이 글은 선생 개인의 감상을 적었다고는 하지만 사료로서의 가치로서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선생은 또한 개인적인 사건에 대한 자료들을 방대하게 남겨놓으셨다. 서도에 대한 깨달음과 관련된 일상의 일들과 스스로 확립한 서예이론들이 그것이다.

선생은 서도 외길을 걸어오는 동안 1,000명이 훨씬 넘는 문하생들을 배출했다. 이들 문하생들 중 500여 명은 대구를 비롯 경향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봉강연서회(鳳岡書硏會)로 이어져 오면서 대구 서예의 명가로서 관록을 더하고 있다.

필자의 어린시절에 문하생들을 가르치는 서실은 진료실 바로 옆방에 있었다. 선생은 진료실과 서실을 오가며 보냈다. 선생의 가족이 생활하는 집은 진료실과 서실을 지나야 했다. 필자는 서실을 지날 때마다 아버지의 부름을 받아 어른들께는 물론 서실에서 공부하고 있는 문하생들에게도 인사를 해야 했다. 어린 마음에 그것은 몹시 부끄럽고 불편한 일이었으나 돌이켜보면 부친의 그 가르침으로 철이 들었고 덕분에 선생의 문하생 대부분을 지금까지도 알 수 있게 되었다.

사실 필자는 교직에서 정년퇴임하고 대구 만촌동에 소헌미술관을 손수 설계해서 건축하여 2014년에 개관했다. 그 후 미술관을 운영해 왔다. 하지만 진정으로 소헌 선생을 제대로 만난 것은 평전을 준비하면서였다. 평전 자료를 준비하면서 비로소 아버지가 아닌 인간 소헌을 만났다. 이것은 이번 평전을 쓰면서 얻은 큰 성과로 다가온다. 선생이 남기신 자료와 유품들을 꼼꼼히 챙기고 읽으면서 선생의 삶을 대하는 태도나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 그리고 예술가로서의 자세 등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고, 한 인간으로서의 소헌 선생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이점이 선생의 평전을 쓰면서 얻은 가장 큰 보람으로 남는다.

앞으로 대구신문에 격주로 연재하게 될 소헌 선생의 일대기와 예술세계를 밀도 있게 고찰하고자 한다.

김영태 영남대 명예교수(공학박사,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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