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편승(老人便乘)
노인편승(老人便乘)
  • 승인 2018.09.30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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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윤 시인
아이들은 언제나 희망이다. 한 가정의 희망이고, 한 국가의, 더 나아가 지구촌의 희망은 우리 아이들이다. 그런 아이들에게 부모와 국가는 지금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아이에게 필요한 건 마음을 나눌 어린왕자의 사막 여우같은 친구인데, 어른들은 그 친구와의 ‘관계’가 미래를 저해하는 요소 중 하나라고 잘못 가르친다. 예외도 있는데, 그 친구가 매우 탁월한 학업성적을 유지하는 경우에 한한다. 물론 그 탁월한 친구의 부모는 내 아이와 친구 하고 싶을 이유가 없다고 가르친다. 경쟁자도 없는데, 경쟁을 가르친다. 부(富)의 정도가 행복의 척도라고 착각하는 어른들이나 학업성적이 그러하다고 여기는 아이들이나 다를 바 없다. 막상 부를 이룬 어른이나 매번 일등만 하는 아이들이 행복하지 못한 경우를 많이 본다. 오히려 우리는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면서 주위사람들의 도움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경쟁자는 오직 자기 자신임을 말이다. 그럼에도 왜 잘못 가르치고 배우려는 걸까.

아이들이 무기력하다. 무기력증(無氣力症, Lethargy)이란 매사에 의욕을 느낄 수 없는 증세를 말한다. 딱히 힘든 일을 해서가 아님에도 늘 피곤하다. 이를 두고 휴대폰이나 게임 등을 원인으로 내세우는 이도 있으나,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무기력은 꿈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이 생겼을 때, 의욕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수개월 전부터 인문학 수업을 하는 아이가 있다. 겨우 14살 난 녀석의 머리는 매우 비상하다. 특히 어른들의 뻔한 수(手)를 파악하는 데는 탁월한 능력을 가졌다. 학교나 학원에서도 선생님들과 시비를 가릴 일이 생길 때마다, 불패(不敗)의 기록을 가진 이 아이의 묘수가 바로 ‘무기력증’이다. 수업목표는 단 하나 ‘꿈 찾기’이다. 부모는 어떤 회유를 통해서라도 다른 아이처럼 이 아이가 정규과정의 울타리에 길들여지길 바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규과정을 이미 겪을 만큼 겪어본 필자의 경험으로 미루어 이 아이에겐 ‘하고 싶은 것’을 찾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이에 필요한 학습을 강화하는 것이 수순이기 때문이다.

노인들의 세상이다. 젊은이들의 기회와 희망을 침탈(侵奪)한 일부 노인들의 세상은 흉물스러운 기운마저 감돈다. 열 살 난 여자아이를 성폭행한, 이웃집 칠십대 노인의 인적사항이 기재된 유인물과 만나는 일은 놀랍지도 않다. 근대화 산업 발전의 격동기를 거친 패기를 그대로 지닌 채, 의학의 기술과 비례한 수명이 연장되어 고령화사회로 접어든 지는 이미 오래다. 65세 이상의 연령이 전체인구의 7%를 넘어섰다는 이야기다. 그들은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낸 장본인답게 ‘새마을 운동의 정신’을 모르는 젊은이들을 나무라면서도, 그들의 자리를 쉽게 내주려 하지도 않는다. 정치나 경제, 하물며 예술분야에서도 그들은 노익장을 과시하며 무능(?)한 젊은이들을 꾸짖는다. 하물며 그들은 SNS까지 활용하며 ‘가짜뉴스’ 양산에도 기여하면서, 국정농단의 주범들의 무죄를 주장하는 파렴치한 모습까지 공유하는 적극성도 보여준다. 대도시로 자녀를 떠나보내고 손주 얼굴을 보러 바리바리 먹거리를 싸들고 버스에 오른 촌로(村老)의 모습은 더 이상 보기 힘들어진 세상이다. 시 한편 소개한다.

선심 쓰듯 잠시 세운 버스에/노인은 힘겹게 계단을 오른다//오늘도 제 덩치를 잊은 버스는/차선을 비켜가며 잘도 굴러간다.//휘어진 등은 굴곡진 삶의 표현(表現)/애원하듯 손잡이를 꼭 잡은/야윈 두 손//뿌연 차창 너머로/손주들의 뽀얀 얼굴이 가물거리고/서투른 미소를 머금는데//급정거로 멈춘 버스 안에는/삶에 찌든 아들의 얼굴이/며느리의 얼굴이/그리고 이내/병들고 지친 노인의 얼굴이//그래/할아비 다 와간다. <노인편승 전문. 월간문학 44p.2010>

‘적당(適當)’이란 말이 있다. 음식은 간이 적당해야 하고, 건물과 건물 사이에는 적당한 간격이 있어야 한다. 노소(老少)는 적당한 질서가 유지되어야 한다. 인격은 대등한 위치에서 이루어지더라도 노인은 삶의 혜안(慧眼)을 통해서 젊은이에게 희망을 이야기해야 하고, 젊은이는 믿음을 가지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질서다. 노인과 젊은이가 대적(對敵)하는 사회는 위험하다. 누가 누구에게 편승할 수 없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저마다의 몫을 해야 한다. 금수저와 흙수저를 당연시하면, 계급사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이들이 마음껏 꿈꿀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가야 한다. 책 한줄 읽지 않는 어른들에게서 아이들이 무엇을 보고 배울 수 있겠는가. 가르칠 것이 없는 어른들이, 가르치려 들면 들수록 아이들의 비웃음만 사게 될 것은 뻔하다. 책상 위에 엎드린 아이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아이의 꿈을 포기하는 순간 대한민국의 미래를 포기하는 셈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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