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의 뻘밭 위 신성한 노동의 순간
풍요의 뻘밭 위 신성한 노동의 순간
  • 황인옥
  • 승인 2018.10.02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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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클럽 삼덕서 정하수展
갯벌 위 일상의 가치 포착
삶의 터전에 역동성 불어넣어
민중미술 이끌어 감옥살이도
시대상 담은 ‘좋은 그림’ 추구
갯벌의일상
정하수 작 ‘갯벌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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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수 작가
가족으로 보이는 한 무리가 ‘널배’로 새벽의 미명을 밀어내고 있다. ‘널배’는 갯벌을 밀고 나가는 배의 일종이다. 널배 위에는 임산부가 타고, 다른 가족은 널배를 끌고 민다. 그들 위쪽에는 먼저 도착한 또 다른 한 무리가 갯벌이 키워낸 먹거리를 캐고 있다. 파도소리, 널배 끄는 소리, 소라나 낙지 캐는 소리만 낭자할뿐 정작 갯벌은 말없이 고요하다. 갯벌에서의 치열한 노동의 순간이 정하수의 붓끝에서 ‘갯벌의 일상’이라는 그림으로 탄생했다. 작품은 ‘갯벌’ 연작 중 하나다.

“갯벌에 의지해 살았던 어린시절 남해바다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렸어요. 할머니께서 남해갯벌을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천국’이라고 하셨어요. 갯벌이야말로 풍요로 생명을 품어 안았던 대지모신(大地母神)이었지요.”

대구 중구 공평동에 있는 갤러리 아트클럽 삼덕에서 열리고 있는 정하수 개인전 제목은 ‘잃어버린 시간과 공간을 찾아서’. 1996년에 봉산동 예술마당솔에서 열린 마지막 개인전 제목과 동일하다. 20여년만의 귀환전인 이유일까? 잃어버린 20년의 시공간을 연결하기라도 한듯 20여년 전 발표했던 작품들과 2000년 이후의 미발표작들을 나란히 걸었다. 적어도 아트클럽 삼덕에서는 20년의 공백은 무의미하다. “작업으로 세상과 소통하지는 않았지만 작업은 계속하고 있었어요. 발표만 하지 않았을 뿐이죠.(웃음)”

◇80~90년대 민중미술의 중심 역할

정하수는 부산출신으로 대신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예사에서 2년간 근무하며 부산 부림 고등공민학교(야간)를 2년간 다니다 중퇴하고 17세 때 서울로 올라가 벽지 제조업체인 경희산업에서 고된 노동자로 3년을 살았다. 당시 독학으로 틈틈이 그림을 그리다가 20대 후반인 1979년 대구로 내려오면서 당시 ‘경북 미술학원’에서 정식으로 그림을 배웠다. 그곳에서 우연히 계명대학교 미술대학의 학생이었던 박용진을 만나 많은 화우들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 그는 경북미전, 신라미술대전에 출품 특선과 입선 했지만 (외양간, 탈춤 등을 소재로 한 유화작품들) 차츰 기존 미술계의 풍토와 작품에 회의와 환멸을 느꼈고 80년대초의 숨막히는 정국 속에서 미술과 사회에 관한 의식을 일깨우면서 민중미술의 중심에 섰다. 1989년의 대형 걸개그림 ‘민족해방운동사’ 사건으로 홍성담 등과 함께 연루, 고문당하고 감옥살이를 했다. “당시 내 민중미술 속에는 긴장과 고통과 희망이 집약됐죠.”

◇민족정신 녹여낸 좋은 그림으로 변화

지난 20년동안 청도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틈틈이 공원을 다니면서 드로잉을 해오다 본격적으로 다시 작품을 시작한 것은 2017년부터. “그림에 대한 열정이 시작되던 차에 태안반도를 다녀오게 됐어요. 그곳에서 어린시절 남해갯벌의 기억을 떠올렸고,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했어요.”

신작들은 목탄과 콘테, 연필, 파스텔, 크레파스 등으로 스케치한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이 가운데 특이하게도 알루미늄 깡통을 펴서 강필로 그어 선을 드러낸 작품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역동적인 노동으로 일렁이는 갯벌, ‘여여(如如)’한 기운이 고즈넉한 운주사의 미륵불, 보름달 아래서 세상을 밝히는 촛불 등의 형상들이 알루미늄 강필 위에서 때로는 팽팽한 긴장감으로, 어떤 때는 고요한 기도로 되살아난다. 작가가 ‘좋은 그림’ 이야기를 했다. 좋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희망에 대한 이야기였다.

“‘잘 그린 그림’은 대상에 대한 묘사가 좋은 그림이지만 ‘좋은 그림’은 시대정신이 담긴 그림이라고 봐요. 내용의 문제죠.”

작가는 자신이 ‘민중 미술가’로 불리는 것에 거부감을 표했다. 그는 스스로를 ‘민중’인 미술가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대뜸 자신의 이름을 되물었다. ‘하수’. ‘하수’의 사전적 의미는 '수준이 낮은 재주나 솜씨'. 작가는 ‘하수’를 ‘민중’에 결부시켰다. 그에게 ‘민중’은 고대로부터 우리 민족정신이 함축된 단어다. 그가 말하는 민족정신은 맑고 순수한 상태. 그의 이름 하수와 민중에 대한 결부는 뼛속까지 민중으로 살기를 희망하는 작가의 의지의 표현이었다.

80~90년대에 잘그린 그림을 추구했다면 지금은 ‘좋은 그림’을 추구한다고 했다. 왜곡된 정치권력과 황금만능 이전의 순수했던 민족정신을 그림에 담아내고 싶다는 것. “일반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그런 그림은 우리민족 고유정신을 회복하는 그림이 될 겁니다. 그것을 위해 깨달음에 대한 공부를 계속해 나갈 것입니다.”

정하수 개인전과 함께 열리는 민중미술운동을 이끌었던 정하수가 과거 운영했던 ‘투명화실’ 아카이브 전은 같은 기간 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의 갤러리 ‘삼삼다방’에서. 010-4354-1017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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