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녀, 툭 떨어지듯
비녀, 툭 떨어지듯
  • 승인 2018.10.07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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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윤 시인
몇 해 전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담담하게 어머니의 부고를 필자에게 전했다. 그 목소리는 평소 ‘시간나면 식사나 같이 하자’고 말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향년 86세. 친구의 어머니는 특별하지 않은 그의 목소리를 통해서 그렇게, 살아있는 세상과 이별을 고했다. 은행나무가 자지러지듯 노랗게 물들어 있는 진입로를 들어서자, 현대식 장례식장이 보였다. 친구는 건물 밖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필자를 발견하고 ‘왔냐?’라고 인사를 건넸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식당에서 만난 것처럼 그는 아무렇지도 않아보였고, 그 모습이 너무 실망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는 어머니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갈치구이 제 손으로 발라먹어본 적이 없을 만큼 귀하게 자란 그는 외동아들이었다.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셨지. 새벽에 들어왔는데, 어머니가 아침에 밥 먹으라고 자꾸 깨우시더군. 그래서 ‘지금 밥 먹으면 다 토할 것 같다’고 소리를 쳤지. 그리고 느지막이 일어나서 보니 밥상에 보를 씌워놓으셨더라. 출근이 늦어서 부랴부랴 출근했지. 그런데 오후에 누나가 전화를 했더라고. 어머니 가셨다고” 친구는 고백성사를 하듯 단숨에 말을 하더니 담배 한 개비를 새로 꺼내 물었다. “아들 밥상 차려놓고 가시는 법이 어디 있어? 아들이 밥 먹는 거는 보고 가셔야지. 좀 기다려 주든가. 반찬이 뭔 줄 아냐? 세상에, 계란말이하고 어묵조림하고…” 거기까지 이야기하던 친구가 고개를 숙였다. 담뱃불을 붙여주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결혼하고 얼마 안 가 이혼을 했던 그 친구는 어머니와 단 둘이 살다가 부랴부랴 집을 팔고, 회사에 자청해서 해외지사로 떠났다. 이제 더 이상 그의 투정을 받아줄 사람이 남아있지 않은 이 땅에서 더 이상의 미련도 없다고 했다. 필자는 기억한다. 어머니가 대장암 판정을 받고, 병원에서도 이미 늦었다고 했을 때, 그가 전국을 다니면서 귀하다는 것을 용케 구했고, 지극정성으로 완치시켰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어머니에게 타박을 주는 것도 그가 잊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톨스토이는 ‘이 세상에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겨우살이 준비는 하면서도 정작 죽음은 준비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하루를 살아가는 만큼, 하루씩 죽어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처럼 욕심을 부리기도 하고, 시기와 질투를 멈추지 않는다. 함부로 사람을 모함하고, 없는 말을 지어내는 것도 모자라서 이러한 것들을 ‘경쟁’이라고 미화시키는 짓도 예사로 저지른다. 가장 그럴듯하게 설득력을 가지는 것이 유산을 풍족하게 남겨서 사랑하는 자녀들이 여유롭게 살아가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수많은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다른 이들도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본인의 과욕으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따르면, 결코 어느 누구도 행복해질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들은 제자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살아가면서, 실수하거나 남에게 상처를 준 부분들을 반성하고 치유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침내 ‘0’에 이르렀을 때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보통 사람들이다. 그래서 성인들처럼 그렇게까지 죽음을 준비할 수도, 그럴 여유도 없다. 하지만 최대한 거기에 가까워지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소크라테스조차도 죽음을 앞두고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다고 고백을 한다. 그의 고백을 두고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지만 분명한 건 ‘빚’을 청산하려는 그의 의지가 죽음을 준비하는 하나의 의식이었다는 점이다. 죽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삶의 시작을 그 누구도 알 수 없듯이 죽음 이후 새로운 시작의 유무도 알 수 없다. 윤회(輪廻)를 믿어서만이 아니다. 어찌 보면 윤리(倫理)를 믿는 편에 가깝다고 하겠다.

친구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밥상을 차려 주는 일로 죽음을 준비했다. 그녀로서는 그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퇴근하고 돌아오는 아들에게 저녁상도 차려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을 지도 모른다. 고인에게 물어볼 수는 없지만 마지막 순간에도 밥상에 보를 덮어 두고 떠나는 그녀의 삶이 아름다운 것이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물론 일상에 지친 아들은 어머니에게 마지막 투정을 부리고 말았다. 그 마지막 투정 때문에 가슴이 아파서 오십년간 살아온 터전을 단숨에 박차고 떠나버렸지만 그래도 그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알고 있기에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당시에 아름다운 그녀의 어머니를 위해서 썼던 시 한편을 남긴다.

어머니, 당신의 가슴에 품은/한 서린 구름 서린 그리움 두고/그리도 바삐 가시려는지//어머니, 그날 짐작 하셨음에/못난 아들 늦은 끼니/정성으로 차려 두고/허위허위 쉬 가시려는지//어머니, 하얀 휘장 걸어두고/저 푸른, 세찬 달빛 서러움 타고/이내 끝내 가시려는지//어머니! 어머니! 아! 어머니!/쉬어라 부르는 어머니! 어머니!/아! 어머니!//끝내 떠나야 하시려는지//어머니, 낡은 비녀/제 가슴에 꽂아두고 마침내/가고야 마시려는지 <‘비녀, 툭 떨어지듯’ 전문. 여자, 새벽걸음 138p.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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