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과 낫’ 이야기
‘붓과 낫’ 이야기
  • 승인 2018.10.08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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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윤 새누리교회
담임목사
나에게 도시는 붓, 농촌은 낫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 붓을 든 사람을 도시 사람으로, 낫을 든 사람을 농촌 사람으로 인식하게 된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 크다. 낫을 든 집안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형님과 마을 선후배 그리고 친구들이 다 낫을 들 때에 홀로 붓을 들고 도시로 나오셨다. 아버지는 고등학교 중퇴의 학력으로 당시로는 드물게 대구에서 법원 서기로 취업을 하신 것이다.

붓을 든 아버지와 낫을 든 큰아버지는 도시와 농촌의 이미지를 각각 내 기억 속에 깊게 남기셨다. 내가 기억의 망을 형성할 어린 시절부터 법조계의 말단에서 일생을 보낸 아버지는 붓을 든 사람답게 항상 책을 보며 무엇인가를 쓰고 계셨다. 그러나 방학이 되어 큰 집을 방문할 때마다 풍겨오는 닭똥과 벼 이삭 냄새 그리고 담장으로 줄기를 올리고 굵은 포도송이를 대롱대롱 매달고 있는 포도나무는 내 어린 시절의 정서 속에 담긴 아름다운 영상들이다.

붓을 든 아버지의 아들인 나도 대학에서 가르치는 일을 직업으로 택하여 낫 대신 붓을 잡았다. 대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되었으니 이제 낫은 영원히 내 손을 떠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대학에서 만나서 가깝게 지내던 제자들이 희한하게 모두 청송, 안동, 예천, 의성, 울진 등의 농촌지역 출신 학생들이었다. 기껏 대구 근교의 칠곡이 고향이었던 내게, 그들은 그들이 자랐던 먼 고향 이야기를 한껏 풀어 놓았다. 그들이 자란 마을, 그들의 학교와 집안 이야기는 이미 아득한 추억 속에 멀어진 나의 옛 고향을 생각나게 했다. 방학이면 고향에 다녀와서 ‘이것 한번 잡숴 보~이소. 어무이가 줍디더.’라며 내미는 고향의 특산물을 맛보노라면 잊어버린 내 고향의 추억이 소록소록 피어났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우리 아이들이 대학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붓을 든 집안에서 자란 우리 아이들은 낫을 들어 볼 수 있는 기회조차 없었다. 가족회의 끝에 아이들을 내가 미리 가본 적이 있는 미국의 중부 지역, 캔사스 주에 있는 대학으로 보내기로 했다. 그 곳에서 아이 둘이 연이어 7~8년을 보냈다. ‘그 곳, 어떠냐?’고 물었더니 아이들의 대답이 무척 목가적이다.

‘아버지, 아침에 소똥 밟고 학교가요. 놀 곳이 없어서 심심해서 기도하고 성경보고 그래요. 그렇지만 도심지에 있는 대학생들이 전혀 부럽지 않아요. 정말 여기 잘 온 것 같아요.’

간만에 귀국한 아이들과 얘기할 때면 미국 농촌의 아름다움을 전해 듣는다. ‘사람이 반가와요. 여기서는 오고 가는 사람들이 다 웃으며 인사해요. 도둑이나 강도의 위험이 거의 없어요. 심심해서 자주 모여 얘기하곤 해요.’ 미국 농촌의 넉넉함이 아이들의 마음과 말을 통해 전달되어 온다. ‘그래. 비록 붓을 든 너희이지만 미국에서나마 농촌을 마음껏 즐겨보렴. 마음껏 얘기해 보고 마음껏 노래해보려무나.’

‘목사님, 여기 와서 좀 쉬었다 가세요.’ 아직은 손에서 붓을 놓을 수 없는 나를 여기저기 낫을 든 분들이 불러준다. 올 추석에도 우포늪 마을의 낫을 든 분들이 우리 가족을 불러 주셨다. 이질적인 붓과 낫이 이렇게도 쉽게 멀어지지 못한다. 붓과 낫이 떨어져 멀어짐직 할 때면 낫은 붓을 잊지 않고 다시 부른다. 낫을 떠난 붓이 그 낫을 멀리해도 낫은 붓을 밀어내지 않고 어색한 만남을 이어간다.

우포늪을 맨발로 걸으며 달을 바라본다. 큰 아버지가 칠곡의 밤하늘에서 보았을 저 달, 내 제자들과 그 부모들이 청송, 안동, 예천, 의성, 울진의 밤하늘에서 보았음직한 저 달, 캔사스의 시골에서 내 아이들이 친구들과 함께 보았다는 저 달을 쳐다보며 나는 우포늪을 걷고 있다.

낫을 든 분들은 붓을 든 나를 불러 주는 데, 붓을 든 나는 낫을 든 그 분들을 부르지 못한다. 그러니 ‘오라’ 할 때 방정맞은 걸음으로라도 달려가 한 입 가득 떡을 입에 넣고서 ‘정~말 맛있다.’는 공치사라도 하며 그 고마움을 대신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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