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忘却)의 선행
망각(忘却)의 선행
  • 승인 2018.10.10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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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호(사람향기 라이프디자인 연구소장)



기억력이 좋으면 좋은 일이 많다. 학생 때는 시험을 잘 쳐서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어서 좋고, 졸업을 하면 그 성적 때문에 좋은 직장도 구할 수 있어서 좋다. 사랑하는 사람의 기념일을 챙길 수 있어서 좋고, 잊지 않고 약속을 지킬 수 있어서 좋다.

반면에 기억력이 나쁘면 불편한 일이 많다. 나이가 들수록 깜빡깜빡하기 일쑤다. 우리는 그 잦은 잊음을 건망증이라 한다.

흔히 사람들이 노트에 들은 것을 필기하는 것은 잊지 않기 위함이 아니라 잊기 위함이라고 한다. 우리가 지금껏 보고 듣고, 생각한 모든 정보를 뇌에다가 저장한다면 아마 우리 뇌는 과부하가 걸려 작동이 멈춰버릴지도 모른다. 치매환자들이 치매가 없는 사람들보다 암 발생률이 더 낮다는 연구결과를 보면 잊는 것도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짐 캐리가 주연한 영화 ‘이터널 션샤인’에서는 잊고 싶은 아픈 기억 때문에 힘들어하는 두 남녀의 이야기가 나온다. 실현 불가능한 이야기(어쩌면 이미 가능할지도 모를 이야기) 일지 모르지만 영화에서는 기억을 지워주는 회사가 있다. 컴퓨터에서 쓸모없는 파일을 지우듯, 사람의 뇌에서 지우고 싶은 기억만 지워주는 회사. 영화의 이야기지만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았다. 지우고 싶은 기억을 선별해서 지울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 나는 어떤 기억을 지울까? 기억을 되살리다 보니 가라앉아 있던 아픈 기억들이 저 밑바닥에서 다시 떠오른다. 아픈 기억들이 한 번씩 가시가 되어 나를 찌를 때마다 아픔이 밀려온다. 잊을 수만 있다면 그냥 하얗게 잊었으면 좋겠다. ‘잊어서’라기 보다는 ‘잊지 못해서’ 힘든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산에 올라보면 이제 막 생명이 된 작은 나무들이 자라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중 키 작은 참나무들이 숲 이곳저곳에서 자라고 있다. 그 작은 참나무들은 도토리가 떨어져 그곳에서 뿌리내린 것도 있지만 이따금 어떻게 저곳에서 나무가 자랐을까 싶은 곳에서 자라는 참나무도 있다. 누가 심은 것일까? 도저히 자랄 수 없을 것 같은 그곳에서 뿌리내려 자라게 된 것은 귀여운 다람쥐의 ‘건망증’의 결과다. 다람쥐의 망각이 착한 일을 한 것이다.

춥고 먹을 것 없는 겨울을 잘 넘겨야 하는 다람쥐는 이 산 저산을 누비며 도토리를 주워 모은다. 여느 계절보다 가을이 되면 몇 배로 더 바빠진다. 주워온 도토리는 한 곳에 모으지 않고 분산하여 저장해 둔다. 어떤 것은 나무 밑 둥 틈 사이에, 어떤 것은 절벽 바위틈 사이에.

당장 먹을 것이 아니다 보니 나중에 먹으려고 깊은 곳에 꼭꼭 숨겨두는 경우도 있다. 바로 사람들과 다른 동물이 발 닿지 않는 바위틈 속에 도토리를 숨기는 것이다. 그런데 숨겨둔 도토리를 어디다 숨겼는지 잊어버리는 일도 종종 발생한다. 그러면 도토리는 ‘개밥의 도토리’처럼 바위틈에 버려진 채로 다람쥐의 기억 속에서 잊혀 간다. 하지만 버려졌다고 생각한 바위틈에서 도토리는 생명이 되어 자란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 지나 따뜻한 봄이 되니 잠자던 도토리의 머리꼭지에서 귀여운 싹이 나왔다. 그렇게 도토리는 하나의 참나무가 되어 긴 세월 바위와 함께 커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연은 참으로 신비롭다. 망각이 생명도 탄생시키니 말이다. 다람쥐의 망각으로 참나무가 자라듯 망각도 때론 선한 일을 한다.

모든 걸 잊으면 안 되겠지만 잊을 건 잊고 살았으면 좋겠다. 이전 경험에 사로잡혀서 지금 앞에 있는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늘 새로운 마음으로 사람을 만나면 좋겠다. 특히 우리 아이들과 가족을 그렇게 만나면 좋겠다. 이전의 실수와 잘못을 가슴에 품기보다 모두 잊어버리고 처음 만났을 때의 마음으로 만났으면 좋겠다. 매일 새로운 해와 달을 대하듯, 매일 새로운 꽃을 대하듯 처음처럼 사람들을 만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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