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의 환한 웃음
거지의 환한 웃음
  • 승인 2018.10.11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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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선 대구교육대
학교교육대학원 아
동문학교육전공 강
고추잠자리 날아다니는 요즈음 하늘빛은 참 곱다. 하늘하늘 날아다니는 잠자리 날개처럼 보드라운 가냘픔에 빨려드는 옥색빛! 나는 옥색빛이 은은한 천에 곱솔 바느질을 해서 만든 곱솔(께끼)한복 치마저고리를 아낀다. 기관장으로 있으면서 학교 예술제나 대외 행사로 손님을 맞을 때마다 입으면 손님맞이 격식이 높아지는 것 같고, 결혼식 주례설 때는 내가 정한 주례복이 되었다. 572돌 한글날 행사에 한글 발전 유공자 자격으로 참가하라는 부름을 받고 그 옥색 한복을 꺼내보았다. 7년간 행사 있을 때 가끔 입어서가 아니라 애초부터 하늘거렸던 얇은 천이라서 저고리 팔 부분 여러 곳이 헤어져 하늘거렸다. 남편은 버리라고 했지만 정 들었고 추억 담긴 한복이라 수선하려고 서문시장 수 바느질 가게를 찾아갔다. 들고 간 가방에서 저고리를 꺼내자마자 내 얼굴을 쳐다보는 가게 아주머니들의 눈빛이 따가웠다.

“우리 가게에서는 못하겠어요. 딴 데 가져가 봐요.”

이 정도는 약과였다.

“아니, 이렇게 헤진 것에 수를 놓으려고? 버려야지. 이걸 어떻게 손질해!”

대놓고 각설이 옷 취급하는 말투에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자존심을 가방에 구겨담듯 헤진 저고리를 급히 구겨 담아 되돌아섰다. 지상철을 타고 돌아가려고 역사로 올라가 서문시장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가을 햇살 속 사람들은 분주하게 오가며 재래시장의 오밀조밀한 장거리, 먹거리를 즐기고 있었다. 내 삶이 지금, 저들 속에도 끼일 수 없는 처지는 아닌데 싶은 생각이 들자 문득 어린 시절 사건 하나가 다가왔다.

잘 살던 집안 살림이 부도가 난 겨울날이었다. 풀빵 장사를 하게 된 아버지에게 가서 국수 살 돈을 받아 저녁거리를 사오라는 어머니 심부름을 갔다. 그런데 포장마차에 들어섰을 때 아버지는 바지주머니에서 절친 약국에서 얻어왔다며 하얀 알약을 꺼내었다. 수면제였다.

“이렇게 자존심 상하게 살아서 뭣하겠냐? 우리 그만 이것 먹고 죽자!”

6학년이었던 나는 순간 문화교실 영화구경을 가서 본 ‘저 하늘에도 슬픔이’ 영화를 떠올랐다. 내 또래인 이윤복이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며 쓴 일기가 영화화되었고 그래서 돈을 많이 벌었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래서 벌벌 떨며 진심으로 말했다. “저도 지금 일기 쓰고 있어요. 이윤복이처럼 돈 많이 벌면 그 돈 모두 아버지 드릴 테니 그때까지 죽지 말아요. 예?” 아버지는 수면제를 슬그머니 바지주머니에 도로 넣으셨다. 글짓기대회 수상자로 비행기 타고 3박 4일 서울여행하며 청와대까지 갔다온 일을 기억하신 탓이었으리라. 나는 고개를 쳐들고 포장마차를 나왔다. 그 뒤 ‘불우이웃돕기 성미’로 모은 쌀 봉투를 우리 반 아이들과 선생님이 우리 집에 가져왔을 때 난 비로소 자존심 때문에 죽고 싶어 하던 아버지 심정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와 한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내겐 긴 시간이 필요했다. 자라서 교사가 되고 동화작가가 되어 첫 동화책의 인세를 받았을 때 아버지는 무덤에 누워계셨다. ‘너는 왜 큰소리로 말하지 않니’ 책을 무덤 밑에 놓아두고 돌아섰을 때 아버지는 등 뒤에서 일러주셨다. “나랑 한 약속은 너 제자들과 가난하게 사는 둘레 사람들에게 베풀며 지켜다오” 긴 세월동안 가슴 깊이 숨겨온 사실을 ‘아버지와 한 약속’ 동화책 속에 처음 펼쳤고 초·중학교에 강의 초청을 받아 갈 때마다 부끄러웠던 내 이야기를 내보이며 그 약속을 지키며 사는 지금의 내 이야기로 아이들과 학부모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준다.

‘그래. 지금은 가난때문이 아니다. 이 옷에 얽힌 추억과 함께 해온 시간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어떤 재벌도 소중한 사람과 추억이 얽힌 낡은 옷을 소중히 여긴 미담 사례가 있지 않은가?’ 그 순간 번쩍 떠오르는 아이디어! ‘그래, 바로 마크야’ 나는 지하철 역사를 되돌아가 마크를 파는 가게 골목을 찾아 들어갔다. 옥색 꽃무늬 그림 마크들을 골라와 저고리의 헤진 부분에 다림질로 눌러 붙이고 바느질로 듬성듬성 꿰매었다. 남편은 거지옷이라며 버리라고 또 한 번 성화였다. ‘이 옷 당신 퇴임식 때도 우리 집 정원에서 드레스처럼 입고 손님들 맞은 추억이 담긴 옷이야!’ 속으로 궁시렁거리며 한글날 아침에 꺼내 입었다. “그 옷 입고 가면 난 안 따라 갈 거야” 남편의 불만을 묵살하며 집을 나섰다. 식장에서 이 방송국 저 방송국에서 나온 기자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시장상을 받았다. 시장과 나란히 서서 기념사진을 찍으며 활짝 웃었다. 거지의 웃음치고 화려했던가? 그날 저녁 텔레비전 뉴스에 그 옷을 입은 내가 비쳤다.

아는 사람들이 문자를 보냈다. “한복도 잘 어울리시고 화면에서 활짝 웃으시는 모습이 보기 좋네요” 내가 활짝 웃을 수 있었던 것은 풍등 날려 70억의 재산 피해를 낸 스리랑카 노동자를 석방하게 청원한 대한민국 국민들의 어려운 시대를 함께 살아온 의식 수준과 법 적용의 판단이 아름다운 사회여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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