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가 귀하던 시절, 나무에 글씨쓰고 닦기를 반복
종이가 귀하던 시절, 나무에 글씨쓰고 닦기를 반복
  • 김영태
  • 승인 2018.10.15 21:2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붓 쥐는 법부터 알려준 부친
5세 때 천자문·글자 익히고
6세 때부터 동몽선습 학습
8세 스스로 서예공부 돌입
소헌비망록
소헌비망록 (1945~1902)120권.

 

 

소헌 김만호의 예술세계를 찾아서 <2> 1908(출생)~1915(8세)

“오토산의 신동” 소헌 김만호 선생은 무신년(1908년) 생이다. 정확히 1908년 10월 19일(음력 무신년 9월 18일 자시)에 경북 의성군 사곡면 오토산하(五土山下) 오상동에서 김공 하진(河鎭, 호 松庵, 자 景源)씨와 전희이씨 순희(順姬)의 2남으로 태어났다. 의성김씨 시조 김 석(金 錫)의 30세 손이자, 중시조인 첨사공(詹事公) 김용비(金龍庇)의 22대 후손이다. 청송 입향조인 도곡공(道谷公) 김한경(金漢卿)의 15대 손이기도 하다.

선생이 태어난 시기는 구한말이다. 그야말로 내우외환으로 혼돈된 격동의 시기였다. 한민족 건국 이래 가장 크고 아픈 상처를 입은 한국근대사의 특수시기였다. 정치상황은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 동학농민운동(1894), 갑오개혁(1894), 을미사변(1895, 명성왕후 시해)로 혼돈 자체였고, 조선을 지배하기 위한 외세의 내정간섭과 패권 다툼은 청일전쟁(1894), 러일전쟁(1904)의 발발을 이끌었다. 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1905년에 강제로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우리의 재정과 외교의 실권이 박탈당하던 민족최대 치욕의 시기였다.

소헌 선생은 늦둥이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송암(庵庵)선생이 49세가 되던 해에 태어났다. 부친은 선영인 의성 오토산에 있는 오토재(五土齋)의 도유사(都有司)로 있었고, 그 당시 화재를 입고 손상된 재실을 진두지휘하며 복구하고 있었다. 모친 전희이씨는 39세, 백형 세호(世湖)씨는 10세였다.

소헌 선생의 총명함은 어린시절부터 빛을 발하였다. 유아기 때 일용천자문 등의 서책을 가지고 노는가 하면, 동리 아이들을 모아놓고 글을 가르치는 시늉을 하고는 하였다. 동네 어른들은 어린 소헌을 보고 오토산의 정기를 타고났다고 신통해 하였다. 평화로운 유아기와 달리 세상은 급변하게 돌아갔다.

선생의 나이 3세때인 1910년에 이윽고 일본은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빼앗고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미명으로 한일병합(경술국치)을 체결하였다. 국토유린과 주권말살이 본격화 된 것이다. 일제(日帝)는 조선토지조사사업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농업 체제를 지배함과 동시에 대규모 토지를 탈취했고, 대다수의 농민은 일제 수탈의 대상이 되었다. 일제의 압박은 날로 심해져 백성들은 희망을 잃고 도탄에 빠져 살길을 찾아 이리 저리 피신을 해야만 하였다. 이 시기에 간도(間島, 압록강 두만강 북쪽지역)로 피난가는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니었다.

일제로부터의 핍박은 선생의 집안이라고 피해갈 수 없었다. 그의 부친도 일제의 모진 압제에 농토를 잃고 민족 고유의 전통을 파괴하고 말살 하려는 정책에 시달려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다. 1912년 임자년 겨울에 오토재 도유사로 3년간 활약해온 정든 고향을 버리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부친의 나이 53세, 선생의 나이 5세 때 가족과 함께 선산을 거쳐 상주로 피난하였다. 상주 청리면 하초리 서산 아래 이르렀을 때 마침 빈 절로 남아 있는 서산사(西山寺)가 있어 급한대로 그곳에서 살림을 시작하였다. 피난살이가 대개 그렇듯 선생의 가족들도 극도로 힘든 생활에 내몰렸다. 부친이 볏짚을 구해 짚신을 삼아 팔아서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참으로 어려웠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선생은 생시에 어릴 적 그때 선친의 짚신 삼는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는 말을 종종 하곤 하였다.

따스한 가정에서 부모형제의 사랑을 받아야 할 어린 소헌이 가장 먼저 체득한 것은 일제강점기의 고통이었다. 내일을 예상할 수 없는 암흑기를 살아가면서도 엄격한 유가(儒家)의 가풍을 지켜오던 그의 부친은 어린 소헌에게 글 공부를 시켰다. 수저를 쥐기 전에 먼저 붓 쥐는 법을 가르쳤다. 선생은 이때를 회상하면서 ‘숟가락 쥐는 것과 붓 쥐는 것을 같이 배웠지…’ 라면서 유가의 가풍을 근엄하게 지키던 선친을 생각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선생은 천자문을 외웠고, 글자도 익혔다. 배일(排日)사상으로 차있던 그 당시 지조깊은 유가의 집안으로써 일본제국의 학문을 배운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었고, 오직 한문공부가 유일한 학문이었다. 천자문을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소헌 선생의 총명함은 이내 드러났다. 글자 한 획, 한 자 틀리지 않고 휑하니 외울 때는 동리 어른들의 칭찬이 대단했다. 오직 그의 부친과 백형에게만 배우고 묻고 익혔던 결과였다.

동몽선습
‘동몽선습’(소헌선생 6세때 학습) 내용 일부.

1913년 계축년, 선생의 나이 6세 때 부친은 서산사(西山寺)를 떠나 그 옆 마공상곡(馬孔上谷)에 신기(新基,새 터)를 잡고 주택을 건축해서 이사하였다. 새 집을 마련하여 생활이 다소 안정되자 부친은 더욱 글공부 가르치기에 열성을 쏟았고, 선생도 그 뜻을 따라 천자문을 단숨에 마치고, 동몽선습(童蒙先習) 학습에 들어갔으며 한글과 99단, 10간 12지 육갑을 6세때 벌써 다 외웠다. 동리 어른들은 ‘오토산의 신동’이 났다고 야단들이었다. 당시 16세이던 백형도 학습지도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그에 힘입어 차츰 붓글씨도 모양이 갖춰져 갔고 글씨에 대한 관심이 커가기 시작했다.
 

7세 부모님 앞에서 천자문 외다
거문고 ‘琴’ 못 읽고 놀라 구토
6.25 동란 때 천자문 책 잃고
거문고 잃은 것 같이 괴로워 해

선생이 얼마나 천자문 공부에 열중이었는지를 알려주는 이야기를 선생에게서 들었다. 1914년 갑인년(7세) 정월 대보름날의 일이었다. 아침 일찍 백형이 천자문 책을 가져오라고 했다. 천자문이라면 자신이 있던 선생은 선뜻 책을 가져와서는 백형이 짚어 주는 대로 부모님 앞에서 한자 한자 읽기를 시작하였는데 그만 거문고 금(琴)자에 와서 막혀버렸다. 그토록 자신 있던 천자문이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리 골똘히 생각해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긴장하여 당황한 탓인지 갑자기 속이 메스껍고 어지럽기 시작하더니 기어이 보름날 먹은 음식을 다 토해 내고 말았다. 천자문 책은 온통 얼룩으로 버려지게 되었다. 서책이라면 자신보다도 더 소중히 여겼던 그는 얼른 구토한 것을 손으로 훔쳐내고 닦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책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그 후 선생은 이 책을 소중히 간직해 왔다. 그러나 6.25동란 때 소실되고 말았으니 선생은 마치 소중히 간직하던 거문고(琴)를 잃어버린 것 같이 내내 가슴 아파하였다고 했다.

을묘 1915년 8세의 어린 선생은 벌써 한문통감(漢文通鑑)을 읽기 시작했다. 주위에서는 문일지십(聞一知十,하나를 들으면 열 개를 안다)의 천재라고 칭찬이 자자했다. 선생은 한문공부와 더불어 붓글씨 공부를 더 열심히 하였다. 당시엔 모든 물자가 빈약하던 때라 종이가 귀하여 겨우 일본 신문지에다 지필(紙筆)할 정도로 종이가 귀했다. 그래서 선생은 나무판대기를 대패질하여 들기름을 먹여 분판(粉板,글씨판)을 만들어 그 위에 먹을 묽게 갈아 글씨를 쓰고 그 뒤 걸레로 닦아내고 또 쓰고 했다.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글씨가 남들의 눈에 띄게 잘 쓰게 되고 한문의 깊은 뜻에 빠지면서 선생은 나름대로 ‘어떻게하면 더 잘 쓸 수가 있을까’ 곰곰이 생각하면서 ‘글자가 어떻게 생성되었는가’ 하는 물음과 의문에 골돌해졌다. 이는 누구의 지도와 도움이 없는 자기와의 외로운 싸움이었다. 주위에서는 필재(筆才)가 있는 신동이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선생은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글씨에 열중이었다. 그러했지만 어린 나이에 혼자의 힘으로 서도(書道)공부를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필자의 이 기록들은 소헌 선생이 직접 작성해 놓은 「소헌약력초」(1908~1992)와 「소헌비망록」(1955~1992), 그리고 선생이 생시에 회고록으로 밝힌 「지난날을 돌아보며」(1977,매일신문 7회연재)와 「나의 회고」(1987, 매일신문 30회연재) 등의 자료에서 발췌하여 서술했음을 밝힌다. 다음 연재는 <소헌 선생의 소년시절 학서기(學書記), 1916(9세)~1923(16)>를 게재한다.

김영태 영남대 명예교수(공학박사, 건축사)

관련기사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