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없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없어지지 않았다
  • 승인 2018.10.15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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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신은 인류에게 포도를 선물했고, 악마는 인류에게 포도주 담그는 법을 선물했다.”고 탈무드에선 말하고 있다. 이맘때면 끝물의 캠벨포도로 잼 만들기 좋은 계절이다. 때를 놓칠세라 서둘러 너슬 포도(혹은 바라포도라 한다)를 구하기 위해 영천으로 향했다. IC를 내려 곧장 체신공단으로 가는 길, 거듭되던 태풍과 무더위의 횡포를 넘긴 갈대숲 바람이 살갑게 불어온다.

너슬 포도는 아무 때나 가서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포도 따는 작업을 계속 하는 와중에라야 하고, 운 좋은 날이면 실컷 맛도 보고 덤까지 챙겨올 수 있다. 포도송이가 알알이 영글어 가고 있는 대로를 지나 길 끝, 맨 가장자리의 중심에 있는 포도밭으로 향했다. 노부부인 듯 보이는 어르신 두 분이 서로 마주보고 앉아 한창 포도 선별작업 중이었다. 그들 앞으로 바싹 다가가 쪼그려 앉으며 말했다.

“어르신, 잼 만들 건데요 너슬 포도 주세요.” 너슬 포도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셨다는 듯 안주인이 내게 물었다. “너슬 포도가 뭐야” 다소 엉성해 보이는 포도를 손으로 가리키며 다시 내가 “어르신 이거요.” 라고 했더니 그제야 알아들으신 듯 어르신은 “아, 바라” 하신다.

“바라 먹지 말고 좋은 놈만 골라 먹어라 새댁아. 내사 마 평생 한 푼이라도 더 벌어먹고 살라고 바라만 먹었더니 인생도 끝물의 바라처럼 살게 되더라카이. 이 나이에 넘들은 마카다 해외여행이다, 단풍구경이다, 간다 카는데 내는 손가락에 물집이 잡히도록 종일 쪼글시고 앉아 바라만 바래고(고르고)있다 아이가.”

곁에 앉아 박스를 손질하고 계시던 할아버지가 할머니의 눈치를 살피시더니 일어나 슬쩍 자리를 뜬다.

“새댁아, 얼라(아기)가졌을 때 생각나나. 좋은 것만 먹고, 좋은 소리만 듣고 좋은 생각만 하라 캤던 거. 생각나제. 그래야 심성 좋고 착한 얼라 낳는다고. 여자건 남자건 사람은 끝까지 그래야 한대이. 대우받고 살라카면” 쉰의 중반을 넘어서려는 내가 아직은 할머니 보시기에 젊은 새댁으로 보였던 것이 살짝 위안이 되었다.

‘살아있는 어떤 인간도 자신의 그림자를 뛰어넘진 못한다.’고 누군가는 말했다. 인생이란 마치 복대에 싸여진 포도송이들처럼 봉인된 기밀문서 같다. 종이를 헤쳐 보기 전에는 잘 익었는지, 덜 여물었는지, 가려내긴 힘들 듯, 어떤 것이 굵고 또 어떤 것이 바라처럼 성글게 열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나는 어제보단 조금 더 좋아지고 성숙해지리라는 희망 속에 오늘을 살아간다.

니코스 카잔차키스(1883~1957)가 마지막으로 집필한 작품 ‘영혼의 자서전’중에는 폭우가 쏟아져 내려 말리고 있던 포도를 순식간에 휩쓸고 가버린 재난의 현장에서, 모든 사람 가운데 혼자 꼿꼿하게 인간의 위엄을 지키시던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버지, 우리 포도가 다 없어졌어요.” 라고 외치는 카잔차키스를 향해 “시끄럽다. 우리는 없어지지 않았어.”라며 문간에 꼼짝 않고, 침착하게 서 있던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해내며 카잔차키스 자신도 그렇게 삶의 위기의 순간들을 헤쳐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우리는 없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카잔차키스의 아버지가 했던 이 말이야말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단 한마디가 아닐까 싶다. 절망스럽고 다시 일어날 힘이 하나도 없을 때 “우리는 없어지지 않았다” 이 말을 떠올릴 수 있다면 접힌 무릎을 다시 펴고 일어날 힘이 생기게 될 것이다. 비록 “바라 먹지 말고 좋은 놈만 골라 먹어라.”는 할머니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나는 해마다 남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바라’를 사서 달콤한 포도잼을 만들고 포도주도 담근다. 빵에 잼을 바르며 ‘바라’를 떠 올린다. 살아있는 한 위엄을 포기할 수 없는 인간의 말, 그 어떤 마법의 주문보다도 힘이 세다고 믿게 되는 말 “우리는 없어지지 않았다.”를 천금처럼 받들며 살아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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