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중농담(醉中弄談)
취중농담(醉中弄談)
  • 승인 2018.10.28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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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윤 시인
듀엣가수 전람회의 ‘취중진담’이라는 노래가 있다. 1996년에 발표한 그들의 2집 앨범의 수록곡인데,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리메이크되기도 하고, 고백을 앞둔 연인들에게 단골로 불리는 노래이기도 하다. 가사를 살펴보면 ‘그래 난 취했는지도 몰라. 실수인지도 몰라. 아침이면 까마득히 생각이 안나. 불안해할지도 몰라. 하지만 꼭 오늘밤엔 해야 할 말이 있어. 약한 모습 미안해도 술김에 하는 말이라 생각하지는 마.’로 시작한다. 멤버 중 하나인 가수 김동률은 필자가 좋아하는 뮤지션이다. 하지만 취중진담이라는 노래를 들을 때마다 유감스럽지 않을 수 없다. 이 노래의 화자는 술김에 사랑을 고백한다. 그리고 아침에 술을 깨면 후회할지도 모른다고 걱정을 한다. 이게 얼마나 무책임한 일인가. 얼마 전까지 화두가 되었던 주취감형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술은 본인이 좋아서 마시는 거지. 누가 억지로 권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런 경우도 없지 않지만, 대부분은 본인의 선택에 의해서 술을 마신다. 이를 멋스럽게 표현해서 ‘술은 자학(自虐)’이라고 미화하는 이도 있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취한 자가 취하지 않은 이들에게 취하는 행동에도 책임은 반드시 따라야 한다.

중국 송나라 유학자였던 주자(朱子,본명 희(熹))는 인생십회(人生十悔)를 통해 일생을 살아가면서 후회할만한, 열 가지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주자십회 또는 주자훈(朱子訓)으로 줄여서 부르기도 한다. 열 가지 중에 아홉 번째에 해당하는 것이 취중망언성후회(就中妄言醒後悔)이다. 취중에 했던 망령된 말은 술이 깬 뒤에 후회한다는 뜻이다. 음주와 관련해서 전해져 오는 일화들은 예나 지금이나 호불호가 불분명하다. 어색하거나 서먹한 관계를 단시간에 친밀감을 느끼기 위해 술만큼 효과적인 약제(藥劑)도 드물지만, 지나치면 거의 향정신성의약품에 가까운 부작용을 보이기도 한다. ‘낮술은 아비도 못 알아본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렇듯 술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탓에, 오랜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진화되어 왔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문제는 애주가들의 수만큼이나 술을 못 마시는 이들도 많다는 점이다. 알코올을 분해할 능력을 갖고 있지 않은 이들에게 술은 극약이나 다름없다. 얼마 전에도 대학생이 신입생 환영회 때 선배들이 권한 술을 마시고 사망한 사건이 발생한 바 있다. 애주가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사건으로 남아서 요즘은 그나마 억지로 술을 권하는 문화는 많이 사라진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한 가지 해결해야 할 과제가 또 남아 있다. 술을 억지로 권하지 않는 대신 술 마신 사람을 무조건 이해해 달라는 요구의 부당함이 그것이다.

음주를 하게 되면 감각기관이 일시적으로 마비되어 잘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따라서 본인이 잘 들리지 않으니, 큰 소리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이는 고성(高聲)이고 내친김에 거리로 나와 노래를 부르면 방가(放歌)이다. 이를 두고 낭만이라 하던 시기가 있었다. 요즘은 고성방가를 하는 사람이 드물지만, 대신 시비를 거는 경우가 많아졌다. 만취한 사람들의 눈에는, 다른 이들도 술에 취한 것처럼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음주 후 호연지기(浩然之氣)의 결말은 대체로 씁쓸한 경우가 많다. 길을 걷다가 툭 부딪히면 맨 정신에는 ‘미안합니다.’하고 지나갈 일을 ‘왜 치냐? 나를 노려봤냐?’따위로 시비를 건다. 물론 술을 마시지 않은 이가 먼저 부딪힐 가능성은 매우 낮다. 그럼에도 귀책사유가 어디에 있는 지 상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술을 마셨기 때문이다. 힘든 일이 있어서 마셨건, 즐거운 일이 있어서 마셨건 모두 본인 사정임에도 불구하고 술을 마시지 않은 사람 탓으로 돌리는 데에서 시비가 붙게 되어 끔찍한 살인사건으로 이어지는 안타까운 일들을 주변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취중에 보이는 행등들은 사람들에 따라서 각양각색이다. 말수가 줄어드는 사람이 있는 반면, 평소에 과묵하던 사람은 수다쟁이가 되기도 한다. 느닷없이 통곡을 하는 사람이 있고, 헤어진 연인에게 전화를 걸어서 뜬금없는 안부를 묻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냉정하게 들릴지 모르나, 술을 마시는 일이 벼슬이 아니듯, 술을 못 마시는 이들이 죗값을 치를 이유도 없다. 술자리에서 힘들게 고민을 털어놓는 친구에게 ‘걱정 마. 내일 내가 다 해결해 줄 테니, 일단 마셔’라고 해줄 수 있는 친구가 당시에는 고맙기만 하고 큰 위로가 된다. 다음날이면 ‘내가 그랬어? 글쎄, 기억이 잘 안 나네. 상식적으로 그게 그렇게 쉬운 문제는 아니잖아?’라고 딴청을 부리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면 술자리에서의 약속들은 모두 비상식의 향연에서 피워낸 조화(造花)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알코올을 과다섭취하게 되면 일시적으로 기억을 못하는 현상을 ‘알코올성 치매’라고 한다. 본인이 한 말을 미화시키거나, 기억을 하지 못하는 현상에 대해서 주위 사람들이 지적을 하는 일이 잦아질 때는, 이를 부정할 것이 아니라 일단 인정을 하는 것이 순서다. 그래야 치유의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술자리도 삶의 한 단면이고 반드시 진담만이 오갈 필요는 없다고 해도 매번 허담(虛談)이나 농담이어서는 곤란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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