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 되던 해, 견문 넓히고자 2년간 글방 순회
16세 되던 해, 견문 넓히고자 2년간 글방 순회
  • 김영태
  • 승인 2018.10.29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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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하는 서도 한계 느낀 9세
창랑 김희덕 만나 1년간 수학
서예가로써 ‘첫 발’ 디딘 셈
본격적으로 ‘大字 쓰기’ 입문
15세 소학·글씨 가르치고
16세 아버지 몰래 집 나서
청송 한시 백일장 참석 ‘장원’
유명 서숙 돌며 학문에 매진

소헌 김만호의 예술세계를 찾아서 <3> 소년시절 학서기(學書記) 1916(9세)~1924(17세)

◇서도의 길 열어준 창랑 김희덕 선생

누구나 자신을 향한 칭찬에는 기분이 좋아진다. 하지만 어린시절의 소헌 선생은 좀 달랐던 것 같다. 선생은 인근에서 붓글씨 잘 쓰는 신동(神童)으로 소문이 자자했지만 그러한 소문과 칭찬을 몹시 거북스러워 했다. 그럴수록 더 묵묵히 글씨 쓰기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사실 어린 나이에 혼자 힘으로 한 공부에 얼마만큼의 깊이에 접근할 수 있었을까? 9세의 소헌 선생의 서도 공부에도 큰 진척은 있을 수 없었다. 스스로 서도 공부를 한다는 것에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이럴즈음 선생에게 한줄기 햇살이 찾아왔다. 뜻이 있는 곳엔 반드시 길이 있는 법. 좋은 스승을 만난 것이다.

9세 되던 병진년(1916)에 당시 경성의 법필사(法筆師)이던 창랑(滄浪) 김희덕(金熙德) 선생이 아버지 송암 선생을 만나러 상주에 왔다가 소년인 선생의 글씨를 보고 너무나 깜작 놀랐고, 자진하여 1년 가까이 독선생이 되어 서법(書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9세의 선생은 창랑 선생을 만나면서 비로소 정식 서도(書道)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동안 참뜻을 모르고 그냥 모양 좋게만 써왔던 글씨가 서법을 배우면서 형태를 갖추어갔고, 그 발전 양상이 실로 놀라울 지경이었다. 그야말로 김희덕 선생과의 만남은 소헌 선생이 평생 서예가의 길로 가도록 한 운명적인 사건이었다.

소헌 선생은 72세때 매일신문에 기고한 ‘나의 스승 그 가르침’(1979.11.3)에서, 60여년 전 서도에 입문하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지금까지 가슴 깊숙이 새기고 있는 「靜觀自得」(정관자득)과 「重思神通」(중사신통)은 당시의 스승 김희덕 선생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술회했다. 김희덕 선생에게 황자원(黃自元)의 임서(臨書)부터 익혔다는 소헌 선생은 스승의 가르침이 너무나 자상하고 헌신적이었다고 회고했다. 더구나 어린 소년인 자기에게 「花開傍樹猶生色(화개방수유생색) 鶯出凡禽不敢啼(앵출범금불감제)」(꽃이 피니 곁의 나무들이 오히려 빛이 나고, 꾀꼬리가 나니 무릇 새들이 감히 울부짓지 못한다)라고 찬(讚)해 주시던 기억은 60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고 아직도 큰 빚을 갚지 못하는 자책감에 사로잡힌다고 했다.

“김희덕 선생에게 특히 대자(大字,큰글씨)를 공부한 기억이 납니다. 지금까지 대자를 많이 쓰고 있는 것은 창랑 선생의 혜안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는 글씨 쓸 종이가 없어 고작 신문지나 분판(粉板,글씨판)을 이용했습니다. 대자는 분판에 쓸 수가 없어서 뒷동산에 올라가서 반석(盤石,평평한 큰 돌)을 찾아 떨어진 빗자루를 붓 대용으로 해서 검정 물감을 물에 타서 글씨를 썼고 솜을 뭉쳐 손에 움켜 쥐고 익히기도 했습니다. 냇가의 모래사장에 나가 큰 막대기로 몸통보다 더 큰 글씨를 썼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서도에 깊이 심취할 수 있었던 것은 김희덕 선생의 격려와 채찍 때문이었다.선생은 유공권(柳公權)과 구양순(歐陽詢)의 본첩을 섭렵하고 상고(上古)의 법첩을 익혔는데 특히 왕희지(王羲之)의 법첩을 대했을 땐 희열을 느꼈었다고 술회했다. 10세때 운명적인 스승 창랑 선생은 떠났고, 그 후 스승을 뵙지 못했다고 한다.

 

소헌선생 70세때의 작품 정관자득(靜觀自得).  소헌미술관 제공
소헌선생 70세때의 작품 정관자득(靜觀自得). 소헌미술관 제공

◇10세 전 명필

10세때가 되자 한학 공부도 통감(通鑑)을 마치고, 논어(論語)와 맹자(孟子)를 파고 들어갔다. 서도도 발전이 빨라 대자에 힘을 쏟았다. 주로 「點劃結構」(점획결구)와 「嚴肅整齊」(엄숙정제)를 자주 썼는데 대자는 어려움이 따랐다. 글씨의 획과 획 사이가 바늘구멍 만한 틈이 생기도록 정연하게 써야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선생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소헌 만의 대자 개척에 힘을 기울였다. 그런 덕에 글씨는 일취월장했고 자신감도 커졌다. 상주 일대엔 이미 어린 명필(名筆)이 났다고 칭찬이 자자할 정도였다. 「10세 전 명필」이라는 소문이 나면서부터 도처에서 사람들이 글씨를 받아가기도 했다. 받아간 글씨로 현판과 주련을 새기기도 했는데 김천공원의 현액이 그 중 하나이다. 그 당시엔 화선지가 몹시 귀하고 구하기도 힘들어서 주로 신문지에 글씨를 받아갔는데 이 때 청하(靑河)에 있는 친척 한사람도 글을 받아가서 벽에 붙여 두었는데 훗날 선생이 그 집을 방문하였을 때 그 글씨 위에 도배를 하지 못해 벽이 움푹 파인 듯 글씨가 남아 있었다. 이때의 액서가 이웃 동리에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일제의 통치와 압박 속에서 가계는 여전히 어려웠다. 아버지는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짚신을 삼아 이를 팔아서 생활을 이어나갔다. 그 당시 고무신은 나오지도 않았고 모두 짚신을 신고 생활했을 때라 짚신의 수요가 많았다. 그런 가운데 그의 아버지는 책을 가까이 하면서 늘 학문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한밤중에 짚신 한 짝을 다 삼으면 선생을 깨워서 그때부터 밤이 다 새도록 글을 읽도록 했다.

12세(1919년) 때의 일화는 부친의 소헌 선생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를 알게 한다. 선생이 12세이던 그 날도 습관대로 아버지가 깨워서 글을 읽는데 그날따라 유난스럽게도 잠이 쏟아졌다. 새벽녘이 되었을 무렵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살며시 방을 빠져나와 방앗간으로 숨어 들어가 두 다리를 디딤돌 위에다 얹었는데 그만 단잠에 빠져 버린 것이다. 이른 아침이 되어서 집에서는 야단이 났다. 보이지 않는 선생을 찾아 마을이 일대 소동이 벌어진 것이다. 이런 일화가 있을 정도로 어린 소헌이 밤을 새며 공부를 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더 열심히 하라고 타일렀다. 열심에는 참으로 끝이 없는가 보다.

그해부터 선생의 경전 공부는 힘이 더욱 실리게 되었다. 인근 왕십리의 김도원(金道源)선생에게 사사하여 사서(四書)를 익히게 되고, 청하 이시우(李時佑) 선생과 만수(萬首) 선생에게 삼경(三經)을 배우게 됐다. 1919년(기미년)은 전국적으로 독립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해이다. 3.1운동의 혼미함 속에서 이듬해 선생의 나이 13세 때에 아버지의 회갑을 맞았다. 혼돈 속에서 곳곳에서는 반일의 사상이 극에 달했고, 선생도 다니던 일인학교를 중퇴해야만 했다. 남달리 반일사상이 깊은 아버지는 일본인 학교에 선생을 더 이상 보낼려고 하지 않았다. 학교를 자퇴하자 글공부에 더욱 전념하게 되었다. 1921년(신유년)에 가서는 한문의 경지가 날로 깊어갔다. 시경(詩經)과 서경(書經) 그리고 주역(周易)도 14세 때에 다 마쳤다.

◇과객생활, 한시 백일장 장원

15세(1922년) 때부터 글공부를 다 익혔다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그해부터 집에 인근 사람 10여명을 모아놓고 소학과 글씨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배우는 시기에서 가르치는 시기로의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그렇지만 마음 한쪽 구석에는 늘 바깥세상에 대한 관심을 품고 있었다. “세상은 한없이 넓은데 나는 우물안 개구리 아닌가”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16세되던 계해년(1923년) 새벽에 이윽고 아버지 몰래 필낭에 먹과 붓을 챙겨 넣고 집을 나서게 됐다. “과연 어느 곳의 누가 글씨를 잘 쓰며 또 문장을 잘 하는가? 한번 맞부닥쳐 보고 나를 한번 저울질 해 보자. 나를 확인해 보는 것이다” 라는 자아가 불꽃처럼 번득인 것이다.

그때 마침 청송에서 한시 백일장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선생은 기꺼이 참석을 결정했고, 당당히 1등 장원을 거머쥐었다. 실로 학문의 성취감에 가슴 들떴던 시간이었다.

청송을 떠나자 선생은 선산을 거쳐 군위에 도착하여 당시 전국에서도 명성이 높았던 외령서당을 찾았다. 그 때 외령서당은 홍순구 선생의 지도 아래 20세 전후의 40여명의 문하생이 한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상주에서 선생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 곳곳에서 많은 서생들이 모여 들었다. 선생은 열흘 동안 머물면서 서로 한학 문답도 하고 글씨를 써 주기도 했다. 산양 왕태골에서 천재로 소문난 고영대 씨와도 교유하면서 시야를 넓혀 나갔다. 해를 넘기고 17세 되던 1924년에도 마공, 가천, 청하 등 유명한 서숙을 순회하면서 한문과 서도를 더욱 깊이 있게 추구했다.

◇ 주경야독

서숙 순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 아버지의 노여움이 선생을 기다렸다. “벌써부터 문장을 한답시고 돌아다니냐”며 몹시 못마땅했던 것이다. 선생은 “다른 곳의 서당은 어떠하며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알고 싶었다”고 아버지를 설득했지만 아버지에게 그것은 한낱 변명으로 치부되었다. 이튿날 아침 눈을 뜨자 소스라치게 놀라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노끈에 묶여 천정에 달랑 메달려 있는 필낭을 본 것이다. 아버지는 “그까짓 것이 무슨 글씨냐! 다시는 과객질 못한다! 이제는 집에서 농사나 지어라!”며 호통을 쳤고, 얼굴은 노기로 가득했다.

그후 선생은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밤에만 글을 읽을 수 있는 그야말로 주경야독(晝耕夜讀)의 고된 생활을 시작했다. 이는 겸양의 덕목을 새기도록 하는 아버지의 교훈이었고, 학문은 끝이 없다는 것을 깨우치게 하는 아버지의 깊은 뜻에 따른 행보였다.

김영태 영남대 명예교수(공학박사,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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