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모습은 언제나 넉넉하다. 그런데 그 터무니없는 넉넉함에 질리기도 한다. 봄여름날에는 가을되면 풍성하게 열릴 실과들을 따서 잘 간직하고 천천히 먹을 요량을 한다. 하지만 막상 가을이 오면 열매들은 거창함으로 압도해버린다. 비실거리며 물러나 그것들을 감히 따겠다는 생각이 옅어진다.
올해는 큰 맘 먹고 도전했다. 죽은 큰 대나무 하나를 잘라 밤나무를 후려쳤다. 후두둑 후두둑 떨어지는데 좀 미안하기는 하다.
25년 된 집의 도색이나 여러 공사를 하여 집 외관을 일신시켰다. 옛날부터 영남 선비들은 집 고치느라 돈 다 쓴다고 했다는데 내가 꼭 그 짝이다.
코스모스 꽃에 호랑나비가 달려들어 탐익한다. 아, 가을이다! 아름답다!
◇신평= 1956년 대구 태생. 서울대 법대卒, 법학박사. 판사와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를 거쳐 현재 공익로펌 대표변호사로 재직 중이다. 한국문인협회 회원이며 한국헌법학회 회장, 한국교육법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철우언론법상을 수상(2013)했고, 저서로는 ‘산방에서(책 만드는 집 12년刊)’, ‘일본 땅 일본 바람’, ‘로스쿨 교수를 위한 로스쿨’, ‘법원을 법정에 세우다.’ 등이 있다.
<해설> 아름다움의 가장 중요한 재료는 시간이다. 시간이라는 포장을 덮으면 아프거나, 추하고 더러운 것 등 성가신 모든 게 아름다워진다.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과거를 좋은 선물로 기탄없이 이해하면 현재와 미래도 선물처럼 열린다. 혼자서, 외로이, 조용한 시간, 살짝 봄여름 마실갔다가 가을로 돌아와 호랑나비로 변신하여 코스모스에게 나마스떼*라고 속삭이고, 잘 익어 쩍 벌어진 왕밤을 로프 없이 번지점프 시킨 뒤, 추운 날 깃대 삼아도 좋을 굵은 대나무 한 그루로 종지박(終止拍)하는 것도 참 괜찮은 선물이다.
*나마스떼 - 지금 이 순간 당신을 존중하고 사랑합니다.
-성군경(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