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얼굴의 망각
두 얼굴의 망각
  • 승인 2018.11.13 20:5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허봉조 수필가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떨어지는 낙엽 앞에서 깔깔거리는 여고생들의 모습이 노랗게 물든 은행잎처럼 예쁘다.

뒹구는 낙엽이 낭만을 부르는 늦가을. 어떤 이는 ‘추억을 먹고 산다’하고, 어떤 이는 ‘추억도 때로는 짐이 된다’며 울먹인 것은 잊지 말아야 할 일과 잊어야 할 일이 교차하기 때문일까.

웃지 못 할 콩트 같은 일이 발생했던 것은, 회의 참석을 위해 부산으로 갔을 때의 일이었다.

해운대 행 시외버스에 몸을 싣고, 좋아하는 팝송을 들으며 적당히 어깨를 흔들고 반쯤 졸기도 하면서 소풍을 가듯 가벼운 기분으로 부산으로 갔다. 회의장소가 있는 벡스코(Bexco)에도 한 시간 가량이나 여유 있게 도착했다. 벤치에 앉아, 따사로운 햇살에 어깨를 맡긴 채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재미가 몇 십 년 세월을 훌쩍 돌려놓는 것 같았다.

회의 시간에 맞춰 몸을 일으켰다. 손을 씻고, 이어폰을 꽂은 채 바쁜 걸음을 옮기던 중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아 고개를 들어보았다. 역시, 한참이나 보고 있었던 듯 “어디를 그렇게 바쁘게 가요?”라며 빙그레 웃고 있는 분이 계셨다. 같은 부서에서 근무했던 직장상사였다. “아, 회의가 있어서요.”라면서 마르지 않은 손으로 악수를 하는 것으로 근 5년 만의 우연한 만남을 뒤로 하고, 회의실이 있는 2층으로 달려갔다.

입구의 모니터는 회의 시간과 내용을 알리고 있었으나, 회의실은 아무 준비도 없이 텅 빈 상태였다. 눈을 의심할 일이었다. 관계자에게 연락을 해보니, 주최 측 사정으로 회의가 30분 정도 연기가 되었다고 했다. 다행이라 싶었다. 조금 전에 만났던 상사께 연락을 할 참이었다. 연배가 비슷하고 소통도 잘 되는 편이었는데, 그냥 헤어지기는 아쉬웠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자음이라도 한둘 떠오르면 꿰맞추기라도 해보련만, 연락처를 죄다 뒤져보아도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함께 근무했던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친구는 ‘박’이라며 운을 뗐다. “맞아, 고마워.”라며 급하게 전화를 끊고, 연락을 하려는데 이번에는 전화번호를 찾을 수가 없었다.

몇 단계를 거쳐 겨우 연락이 닿았을 때는, 전시장을 돌다가 이미 밖으로 나갔다는 것이 아닌가. 통화를 하는 것만으로 아쉬움을 달래기는 한참이나 부족했지만 나의 불찰로 안부라도 주고받을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으니, 매우 황당하고 부끄럽기 이를 데 없었다. 잊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다른 한 가지, 꼬리를 물고 자꾸 생각이 나 허전한 마음을 더욱 어지럽게 헤집어놓고는 하는 일이 있다.

한 계절이 훨씬 지난 일이다. 가까운 목욕탕이나 시장 또는 산책을 나갈 때, 손목에 걸고 다니던 작은 가방 하나. 빨강과 검정이 기하학적 무늬로 적당히 어울린, 가방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작은 느낌이 없지 않다. 하지만 그 속에는 휴대폰은 물론 예금통장과 현금, 비상용 비닐봉투와 우산겸용 양산 등이 들어있었으니, 지갑이라고 하기에는 좀 큰 것이 사실이다.

주말이 시작되는 금요일 저녁, 자주 가는 참새방앗간 같은 옷가게에서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다가 반찬가게에 들러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양 손목에 비닐봉투가 걸려 무게감을 느끼고 있었다. 무심코 몇 발짝을 옮기다가 뭔가 이상해 걸음을 멈추었다. 아뿔싸, 작은 가방이 없어진 것이었다.

급히 반찬가게로 되돌아갔다. 조금 전 나의 왼쪽에서 서성이던 사람은 이미 자리를 떠났고, 반찬가게 주인만 놀란 토끼 눈으로 ‘빨리 신고를 하라’며 걱정을 해주었다. 신고할 것까지는 없다고 하면서도 아쉬움을 감추지 못한 채 그 주변을 선뜻 벗어나지 못하고, 두어 번을 맴돌다가 돌아왔다. 혹시 현금 이외의 필요 없는 물건들은 던져버리지 않았을까 싶어서였다.

오래 전에도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 주변을 일부러 둘러보는 습관도 생겼다. 그날따라 평소보다 많은 현금은 왜 갖고 나갔을까? 휴대폰은 음악을 듣기 위해 손에 들고 있었으니 다행이었으나, 누군가 손수 천으로 만든 가방이 자꾸 눈에 밟힌다. 하루 빨리 잊어야 할 일이다.

그래, 누굴 탓하랴. 이 가을, 티 없이 높고 맑은 하늘의 기운이 가슴 가득 밀려들어오기를 기대할 뿐. 잊어야 할 일은 빨리 잊고, 기억할 일은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는 신선하고 상쾌한 기운을 말이다.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