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46년 정세 혼란 속 ‘中化 1편’ 쓰며 덕을 쌓다
1945~46년 정세 혼란 속 ‘中化 1편’ 쓰며 덕을 쌓다
  • 김영태
  • 승인 2018.12.10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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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이 진부하단 편견 팽배
서양문물 유입·일제 잔재 탓
"전통인 서도, 등한시 안 돼"
서도 연구·실습 묵묵 정진

소헌 김만호의 예술세계를 찾아서 <6> 중년시절1. 1946년(39세)

◇병술(1946년)감상

마침내 고대하던 민족의 염원인 8?15 해방을 맞이하였지만 광복의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 나라는 또 한 번의 혼돈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친일파 단죄가 정국을 휩쓸었다. 친일파를 단죄해야 한다는 당위성에는 한마음으로 동의하였지만 과정은 실로 무법천지로 흘러갔다. 친일파 한국인을 벌주어야 한다는 마음이 컸던 만큼, 사람들의 친일파 발본색원의 행태는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당시 소헌 선생은 38세의 중년이었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친일파반대폭동사고방지회’가 발족되고 면민(面民) 투표로 선생이 회장으로 추대됐다. 회장에 피선된 선생은 마을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서로가 손잡고 평온 속에서 질서를 잡도록 계명 지도에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새나라의 주민들이 새살림을 꾸리도록 돕고 희망을 가지도록 격려하고 성원했다.

그렇지만 국내의 정치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만주전쟁에 승리한 소련군이 한반도 북쪽에 진출하였고, 서울에 진주한 미군은 북위 38도 선 이남의 지역에 군정을 실시한다는 포고령을 내렸다. 이윽고 한반도가 38도선을 경계로 해서 북쪽은 소련이, 남쪽은 미국이 점령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로서 38선은 지금까지 한국이 남북으로 분할되는 분단선이 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1945년 12월 모스코바 삼상회의(미,영,소)에서는 ‘한반도에 통일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하고 향후 5년간 한국을 신탁 통치한다’고 결의하였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이를 거부하기 위한 반탁(反託)운동과 함께 친탁(親託)의 시위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면서 정국이 시끄러워 졌다.

해방 이듬해 39세 때인 1946년 병술 새해에 소헌 선생은 그 당시의 착잡한 심정을 다음과 같은 감상문으로 기록해 놓았다.

36년간 왜정(倭政)의 가혹(苛酷)을 겪고 을유년(1945)에 와서 일본과 미국의 전쟁이 최고도에 달했다. 가축과 곡식을 군량으로 수송하고 지원병, 학병, 해군병, 항공병, 보국대, 의용대 등 형형색색의 명칭으로 징용되어 조선 동포의 생명이 조불려석(朝不慮夕)으로 걱정하기에 이르 렀다. 이윽고 8월 15일 12시에 일본이 미국에 항복하니 민명(民命)이 해방이다. 해외에서 30 여년간 조선 문제에 노력하여 온 憂國(우국) 志士(지사)의 은덕으로 국운을 회복시켜 독립선 언이 연합국에서 방송되니 우리 삼천만 동포는 다행히 복을 얻었다. 그러나 경거망동(輕擧妄 動)하여 혹 사사로운 감정으로 살인도 하고 혹 공염(公嫌)으로 균타(拘打)도 하며 방방곡곡이 무법 천지로 사쟁공투(私爭公鬪)의 정동언어(靜動言語)가 무비난이(無非亂離)하다. 17일 오후 에 나와 동인 4~5명이 30명을 모집하여 자위대를 조직하여 주야 불문하고 각 부락에 순회 강연도 하며 계몽 지도와 진압 등 여러가지로 노력하던 중에 청소년 모임과 면내(面內) 유지 들을 통합한 치안회가 결성되어 면민(面民)투표로 회장으로 피선되어 친일파반대폭동방지회 라 명칭하고 치안과 사고 방지에 주력하였다. 그 외 각 방면으로 적극적 활동을 펴 나가며 중앙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바, 삼천리 지역을 38도선으로 분할하여 이북(以北)은 소련이 이남(以南)은 미국 양군이 진주하여 군정(軍政)을 선포했다는 소식이다. 사람들은 각 관청의 고문관이 되기로 관기동정(官其動靜)하니 독립 일자가 지연됨은 확연한 일이다. 매일 중앙 소식을 거수(擧手) 기대하였으나 국운이 못 미치었는지 국민이 통일치 못하고 각자 대장으로 의사를 주장하며 부하를 인솔하고 무리지어 당파(黨派)를 이루고 있다. 그 중에는 인걸(人傑)도 다수가 있고 애국 지사(志士)도 다수 있으나 자고로 소위 세불양립(勢不兩立)이거늘 80여 단체가 통합하여야 될 것이다. 미·소 양군이 마땅히 철수되어야 할 것인데 민도(民度)가 낮고 시기가 미급하니 반드시 급속히 해야 될 일은 대중의 마음과 의지가 가일층 마연(磨硏)되어 야 할 것이다. 어느 정당(政堂) 어떤 방침이 우리 삼천만 대중에게 적절한지 국민의 인화와 도덕의 강화가 확고해진 후 정부가 수립되어야 한다. 그러나 정당 중에는 시일을 단축하기 위하여 무리하게 대중을 인솔코자 하여 사리사욕과 자리 다툼의 허욕이 드러나고 있으니 어 느 정당을 막론하고 단점이 없지 아니하다. 심지어 정당끼리 적대시 하니 참으로 통탄할 일 이다. 조선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진주한 미,소 양군은 점점 대세를 이루어 가며 시일을 지 연시키고 있는지라, 오직 나는 대세를 살펴보면서 마음 잡기가 극히 어렵다. 매일 근심으로 강구(講究)하나 심통(心通)을 얻지 못하고 이를 헤아릴 수가 없으니 한탄스럽기 그지없다.

병술(1946) 1월 1일부터 두문 불출하여 3주일 동안 中(중)자 1자를 얻고서 그 뜻을 해석하여 中化(중화) 2자로 문장을 필기(筆記)하고 나니 자연히 마음이 기쁘고 즐거워졌다. 말을 함에 는 반드시 그 中(중)을 생각하고, 행동함에도 반드시 中(중)을 생각하고, 벗을 사귐에 있어서 반드시 中(중)을 생각하며, 시비에는 반드시 中(중)을 생각하고, 음식에도 반드시 中(중) 을 생각하며 모든 일을 행함에 반드시 많은 실마리가 있음을 생각하나 어려운 것은 中(중)이 다. 재주가 둔하고 덕이 박함을 한탄한들 어찌하겠는가. 그러한즉 홀로 中(중)을 잡지 않을 진댄 벗을 좇아 中(중)을 찾음이 마땅하고 또한 그러할 것이다. 나는 덕이 본래 없으니 어진 벗을 어찌 맞이하리오

<중략>

비록 천하게 태어나도 분수를 알고 착한 행동을 하면 역시 中人(중인)이요 지난 날에 악한 일을 하였어도 개과천선(改過遷善)하면 이 역시 中人(중인)이라, 바른 道(도)로서 中(중)을 얻 은 사람이 어찌 化(화)를 얻지 못하리요. 化(화)라는 것은 큰 덕이 돈독히 변화한 것이니 악 한 사람이 스스로 힘씀이다. 效(효)는 곧 化(화)이니 속히 힘쓰는 사람은 속히 변하여 中(중) 하고 깨달은 사람도 반드시 변화되고 악한 사람이 모두 변화한 즉 천명(天命)을 받은 것이다. 천명을 받은 즉 나라에 잘못된 정치(政治)가 없을 것이오 이웃 나라들도 모두 변화하리니 어찌 큰 道(도)가 아니리오.

<후략>

병술 정월 이십구일 김만호
 

중화1편-1946
소헌 선생이 1946년(39세)에 저술한 「中化1편」

◇효시은거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급박하고 혼란스러운 정세 속에서도 선생은 마음을 닦는 일에 소홀히 하지 않았다. 병술년 정초에 3주일 간 은거하며 「中化1篇」(중화1편)을 저술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시간이 선생에게는 세상의 번거로움을 피하여 혼자 자득(自得)의 덕을 쌓는 깨달음의 시간이 되었다. 그야말로 효시은거(효市隱居, 소란스러운 세상을 피하여 스스로 덕을 쌓음)였다.

또 한 번의 혼란 정국은 선생으로 하여금 서도(書道)에의 의욕과 사명감을 더욱 부채질하는 계기가 되었다. 선생의 집에는 묵향이 밤낮없이 풍겨 나왔고, 피어오르는 묵향 따라 서도의 정열도 점점 더 높게 타올랐다. 그러나 일제 36년 동안 너무나 혹독한 문화말살정책은 전통문화 경시 풍조로 이어졌고, 우리의 전통 문화는 진부하고 고루하다는 편견이 사회전반에 팽배해졌다. 일본에 의한 서양문물의 이식과 일제의 잔재들이 우리 근대를 비정상적 왜곡으로 치닫게 했던 것이다. 그럴수록 선생은 “우리의 맥락과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온 서도를 결코 등한시 할 수 없다. 우리의 말과 글이 없어지지 않는 한 서도는 언제고 그 진정한 빛을 발할 때가 올 것이다”라는 확신과 신념을 더욱 굳히며 서도의 연구와 실습에 묵묵히 정진해 나갔다. 이때의 소헌 선생은 소란스러운 저자거리에서 은거하며 신선이 산다는 십주(十洲, 전설 속의 평화로운 10개의 섬)를 생각하고 있었다. 다음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6월 25일 선생의 생각을 읊은 술회운(述懷韻)이다
 

효시은거1946
효시은거, 소헌 선생의 자작시 8편외 25편을 自筆(자필)한 시문집.

題효市隱居 (제효시은거)/ 數間容膝起斯樓 (수간용슬기사루)/ 近市索居歲月流 (근시색거세월류)/ 蜀路何行尋正路 (촉로하행심정로)/ 四難可畏愼來頭 (사난가외신래두)/ 交友嘗憎來日變 (교우상증내일변)/ 修身應有後期悠 (수신응유후기유)/ 隋時隱退收心計 (수시은퇴수심계)/ 案上生涯勝十洲 (안상생애승십주)/ 解放翌年丙戌六月二十五日述懷韻/ (해방익년병술6월25일술회운)

시끄러운 저자거리에서 은거하다/ 몇 칸의 거처할 좁은 이 집을 지으니, 저자거리 생활에 쓸쓸히 세월만 흘렀네/ 험한 길 어디로 가야 바른 길 찾는가, 온갖 어려움 두려우나 신중함이 제일일세/ 벗을 미워하면 내일이 달리 변하고, 몸을 닦아 대하면 뒷 날이 기약되느니라/ 때에 따라 은거함이 마음 닦는 법이니, 서책과 함께 하는 삶이 십주보다 나으리/ 해방 이듬해 병술년 6월25일에 내 생각을 읊다

김영태 영남대 명예교수(공학박사,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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