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품은 닳는 것… 비누유물로 보는 소멸의 가치
예술품은 닳는 것… 비누유물로 보는 소멸의 가치
  • 황인옥
  • 승인 2018.12.10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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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가 신미경 ‘오래된 미래’展
내년 5월 19일까지 우양미술관
25년간 작품 여정 총망라
미발표작 포함 230점 선봬
비누조각 풍화 거쳐 작품으로
서양 고전유물 새롭게 해석
시간과 역사의 의미 곱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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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경 개인전이 경주 우양갤러리에서 내년 5월19일까지 열린다. 우양갤러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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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경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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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경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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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경 作.

그리스 조각하면 맥락이 전혀 다른 두 개의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파르테논 신전이나 대영박물관에 옮겨놓은 유물과 미술 학원이나 미술대학 실기 시간에 학생들 앞에 주어진 드로잉이나 조각의 대상이 되고 있는 그리스 조각이다. 장면을 떠올리는 대상으로 보면 전자는 일반인, 후자는 미술 작가, 시점으로 보면 전자는 과거, 후자는 현재에 해당된다.

작가 신미경이 파르테논 신전을 경유해 영국 유학길에 오르면서 ‘어떤 조각을 할 것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빠져들 때 실마리를 제공한 것이 그리스 조각상과 유물들이었다. 그녀가 “그리스인들에게는 고전인 그리스 조각상이나 유물이 우리에게는 매일 공부해야 하는 현재성이라는 것은 충격이었다”며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 충격이 ‘나 다운 것’, ‘한국인 조각가로서의 정체성 찾기’로 이어졌다는 것.

“조각가의 길을 가기 위해서 그리스 조각상을 열심히 그려야 했어요. 그런데 막상 파르테논에 와서 보니 그 유물들이 우리 것이 아닌 유럽의 것이라는 걸 깨달았고, 언어와 사고방식이 다른 내가 그들과 같은 미술을 하는 것은 맞지 않다는 자각을 하게 됐죠.”

작가 신미경 개인전이 우양미술관에서 열린다. 우양미술관 ‘2018년 우양작가시리즈’에 신미경이 선정되어 진행하는 전시다. 전시에는 작가의 국내 미발표작과 신작 60여 점과 지난 7월과 9월 사이에 열린 아르코미술 개인전에 발표됐던 건축 프로젝트를 더해 총 230여점의 작품을 소개한다. 작가의 25년간의 작업 전반을 이해할 수 있는 대규모 전시로 꾸려졌다.

신미경 조각의 대상은 유물이다. 박물관에 소장되거나 폐허에서 발굴 중인 유물을 재현해 과거 시대의 유물처럼 전시장에 펼쳐놓는다. 그녀가 “‘재현’보다, ‘번역’이 맞다”고 했다. “제 시각에서 새롭게 번역한 유물이라고 보는게 맞아요.”

그리스 조각상은 역사를 지나오면서 그때마다의 시대상에 걸맞는 의미를 덧씌워왔다. 유럽이 빛나는 역사를 지나올 때마다 조각상에도 빛나는 성스러움을 덧씌웠던 것. 신미경은 유럽인들이 조각상에 덧씌워놓은 의미들이 그녀에게도 유효한지에 대한 의문을 품었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새롭게 해석을 가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신만의 조각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유럽인들이 유물에 가한 의미가 제게는 유효하지 않았어요. 그러면서 나만의 번역체계를 통해 세상을 바라봐야 주체적 관계를 만들 수 있다 생각했어요. 그것이야말로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작점이었으니까요?”

대학에서 그리스 조각을 현재성으로 다루며 유럽의 고전을 그녀와 동일시 했지만 막상 파르테논 신전이나 대영박물관에 가서 맞닥뜨린 그리스 조각은 유럽인의 문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다가왔다. 이방인의 신분으로 유럽인의 유물 앞에 서게 되자 새로운 해석의 촉이 새록새록 올라온 것. 당시 그녀의 해석 레이더망에 걸린 것이 조각의 원료인 돌이었다. “조각에 쓰인 돌들의 재질이 의외로 무르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흡사 비누처럼 부드러워 보였죠.” 신미경 특유의 유물 비누 조각의 출발이었다.

“비누조각이 서양고전을 해석하는 동양인 신미경의 상태를 대변하는 하는 것 같았어요. 비누야말로 제게 딱 맞는 소재이자 주제를 명확화하는 개념으로 다가왔죠.”

25년간 한국과 영국을 오가며 비누조각에 집중해온 작가의 메시지를 가장 잘 대변하는 작품은 ‘풍화 프로젝트’와 ‘화장실 프로젝트다’. 미술관 입구와 옥상에 설치하거나 여자화장실 세면대 옆에 비누작품을 설치해 풍화작용을 거치게 한 후, 전시가 끝나면 닳은 비누를 ‘작품’으로 명명하는 것.

작가가 “비누 조각상이 시간과 인간에 의해 풍화되는 과정을 그리스 조각이 유물이 되는 과정에 은유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존재하지만 사라질 수 있는 비누조각을 통해 영원무궁하다는 서양 조각의 우월주의을 비틀고 싶었어요. 그리고 동서양과 현재와 과거를 뒤섞으며 사라지는 것과 존재하는 것의 중간 접점을 보여주며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제시하고 싶었죠.”

작가는 비누 조각을 통해 견고한 권위와 위계에 대한 의문, 상이한 문화적 배경에 따른 번역과 해석의 필연적 왜곡, 예술품 혹은 유물의 성립방식에 대한 고찰, 나아가 소멸된 흔적을 통해 가시화되는 시간의 역설적 측면 등을 전시 제목 ‘오래된 미래(Ancient Future)’에 개념적으로 녹여내고 있다.

조각으로 개념미술을? 쉽게 접하지 못한 조합이다. 고전 매체이자 정적인 조각으로 개념미술을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미경은 해냈다. 고전인 유물을 조각화해 개념미술로 펼쳐놓는다. 이 점이 그녀 조각의 개별성이자 특수성이다.

동서양 유물에 대한 작가의 재해석과 회화를 바라보는 작가의 개념적 태도가 물씬 묻어나는 비누 작품을 대거 만나는 신미경 전시는 내년 5월 19일까지. 054-745-7075

황인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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