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옥이 만난 작가]서정임, 불명확한 형태에 빗댄 생명의 유동성
[서영옥이 만난 작가]서정임, 불명확한 형태에 빗댄 생명의 유동성
  • 서영옥
  • 승인 2018.12.17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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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순간이 다른 생명체
경계 모호한 그림으로
고정되지 않은 삶 찬사
접시꽃 서정임
서정임 작 ‘접시꽃’

 

서영옥이 만난 작가-서정임

작품은 작가가 본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진입로다. 작가의 예술적 신념을 읽을 수 있는 단서이기도 하다. 그것이 다소 불친절하다. 얼핏 보면 미완성작(作)이라 할만하다. 작가 서정임의 회화에 대한 소회이다.

제목도 없다. 물결에 반사된 햇빛과 일렁이는 잎 사이로 얼굴 내민 꽃들은 제 형상을 스스로 밀어낸 듯 색과 형태가 불명료하다. 실루엣에 가까운 인물들은 배경 속으로 스며들 태세다. 간간이 느껴지는 마티에르는 거칠게 조형요소들을 다시 표면 위로 밀어 올린다. 규정지을 수 없는 붓질이 속력을 내며 아련한 감각(또는 감성)에 잔상을 남긴다. 단서가 희미한 그림이다. 그 위에 새겨놓은 ‘Seo’라는 이니셜만이라도 선명하니 다행이다 싶다. 그것이 묘한 여운을 남기며 울림으로 다가온다.

아이러니하게도 서정임의 불친절한 회화(2018년 12월 5일~12월 9일, 봉산문회회관, 4회 개인전) 앞에서 내뱉은 말은 지의(知意)였다. ‘지음(知音)’에서 차용한 말이다. 백아절현(伯牙絶絃)에서 유래한 지음은 소리(음악)가 가교이다.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는 거문고 소리를 매개로 둘도 없는 벗이 되었지만 “두 사람을 맺어준 매개체가 음악이 아닌 조형이었다면?” 에 자답한 것이다. 작품 속에 묻힌 작가의 예술적 신념에 동참한 것은 ‘공감’ 다름 아니다. 공감할 때 감상자의 희열은 고조된다.

회기본능일까. 설치와 영상 디지털 작업에 몰두하던 그녀가 다시 붓을 잡기 시작한 것은 2012년부터다. 독일 카셀미술대학교 뉴미디어과 학사 및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와서이다. 2013년~2015년에는 새와 닭, 독수리와 같은 ‘조류’를 주로 그렸다. ‘꽃’이 그 뒤를 잇다가 2016년~2018년 그림에는 ‘꽃’과 ‘사람’이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소재로 삼은 꽃과 인물, 동물은 섹션마다 고유한 텍스트를 유지하지만 표현법은 일맥상통한다. 이들은 작가 자신의 감정이입 대상물로 봐도 무방하다. 소재는 모두 우리 주변의 것들이다. 곧 현실반영인 셈이다.

제주의바람
서정임 작 ‘제주의 바람’

화가들이 일상에서 화인(畵因)을 찾기 시작한 것은 19세기부터다. 자연주의와 사실주의가 대표적이다. 그것이 회화의 중심 인식으로 등장한 것은 인상주의에 와서라고 할 수 있다. 역사나 종교적인 내용을 주제로 삼은 신고전주의나 신화 위에 상상력을 불붙인 낭만주의에서 벗어나 인상주의에 이르면 회화는 가장 직접적인 현실반영이 나타난다. 회화의 내용이 역사와 신화에서 일상사로 전환되었다는 것은 뚜렷한 주제를 버렸다는 의미이다. 서양미술사에서는 19세기 이전까지의 미술을 ‘주제의 미술’로 본다. 19세기 이후의 미술은 ‘모티브의 미술’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현대는 근대의 이러한 지형도(이성)를 해체하는 Post(탈脫) 작업에 돌입했다. 바로 서정임의 회화가 위치하는 지점이다.

다시 서정임의 그림 앞에 서보자. 흩어진 붓 터치를 한데 모았다가 흩치기를 반복하니 붓의 결이 함의하는 바가 보이기 시작한다. 스케치북을 곁에 두고 재빨리 현실을 묘사한 마네나 모네의 행보도 얼비친다. 생명체의 미세한 움직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서정임의 회화는 철저히 주관적인 감정으로 채워졌다. 주관적인 감정을 존중하면서도 현실을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린다는 점에서는 사실주의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다. 그의 주관적인 감정은 그 자리에 영원히 남기를 바라는 기념비성(Monumentality)에 얽매여있기를 거부한다. 고대나 르네상스미술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모순된다 할만하다. 그것이 우리를 시간의 체험으로 안내한다. 마치 웨이브 패킷처럼 불확정성의 원리로 몰고 간다. 양자 물리학에서 입자를 설명하는 방식인 웨이브 패킷은 진동수와 진폭이 다른 파동으로 설명된다. 그 움직임이 니체의 시간개념까지 관통한다. 니체의 무한히 이어지는 영원회기(영원히 나에게로 다시 돌아옴)나 불교에서 주장하는 윤회(다른 것으로 돌아옴)의 문까지도 두드리게 한다. 모두 움직임으로 일관된다.
 

서정
서정임 작 ‘튤립’

삶은 늘 유동적이다. 눈에 의해 인식되는 것은 모두 움직인다. 마음이 개입하는 한 부인하기 어렵다. 서정임의 그림 속에 도사리고 있는 것도 결국 움직임이다. 움직임은 곧 생명이다. 서정임의 회화는 생명(삶)에 대한 관심표명이다. 유동적인 생명체가 핵심 모티브인 그의 그림은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생명체를 둘러싼 삶의 경험이 밑바탕이다. 그녀가 박진하는 현실묘사를 디지털 영상이 아닌 회화로 시도한 연유는 비장했다. 그간의 다양한 업적들을 모두 내려놓고 다시 회화로 돌아온 비장한 각오를 차치하고라도 ‘유동적인 시간성과 생명예찬’은 우리가 서정임의 회화에서 주목해야할 대목이다.

그의 회화는 근대미술의 특수한 양식을 빌려온 듯 하나 시대를 초월하는 삶(생명)을 통찰한다는 점에서 근대미술과는 차별화된다. 이를테면 꽃의 표현만 봐도 알 수 있다. 꽃을 ‘꽃’으로만 단언하기에는 모자란 감이 없지 않다. 그가 꽃잎을 선명하게 그릴 수 없는 이유이다. 만개한 꽃의 근원은 씨앗이다. 줄기와 잎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볼 때 꽃은 이미 줄기이자 잎이고 뿌리이며 씨앗이다. 생명을 품고 있는 꽃의 모태인 씨앗은 주변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곁에는 흙과 수분, 햇볕이 머물고 바람과 구름 사이로 낮과 밤이 지나간다. 이 모든 요소들이 적절하게 어우러질 때 비로소 꽃은 꽃으로 존재할 수 있다. 피어있는 순간에도 꽃은 움직인다. 세포분열 중이거나 다음 단계로 진화할 계획 중에 있는지도 모른다. 서정임은 이렇듯 식물과 동물 인물을 통해 유동적인 삶에 대한 경외감을 회화로 자문한다.

모든 생명체는 한 순간도 고정태일 수 없다. 따라서 유동성을 고정태에 담으려고 한 모순이 서정임의 회화가 지닌 결정적인 한계이다. 그러나 모든 그림이 허상임을 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엄밀히 따지면 리얼한 사진이나 움직이는 영상도 허상이다. 그 허상들이 진실을 일깨워주는 설득력을 갖는다. 놓칠 수 있는 소중한 것들도 되돌아보게도 한다. 일깨움은 예술창작의 범주를 넘어 철학과 맞닿는다. 세월은 흘러가고 존재의 수레바퀴도 쉬지 않고 굴러간다. 살다보면 변방으로 미뤄 놓았던 것들이 가운데로 오기도 한다. 그 틈에서 나의 위치는 어디인지, 지금 이 자리가 진리의 자리인지 의심하며 시간의 가치체계를 뒤바꾼 니체처럼 서정임의 회화는 그림으로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을 질문한다.

그의 이러한 노력이 지식의 축적과 기술의 습득보다 가치 있는 삶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하는데 일조한다. 바로 서정임의 회화, ‘생명 Life-Painting’이 지닌 힘이 아닐까 한다. 그 앞에서 사유의 게으름을 반성하게 된 이유이다. 찬 겨울 날 장작난로가 삶의 온도를 높여주던 그의 화실은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산실이었다. 발 빠른 세상에 타협하기보다 느린 기타 선율에서 삶의 진리를 찾으려는 40대의 젊은 작가 서정임의 행보가 기대된다. 그의 환한 앞날을 위해 미흡한 이 글이 무엇인가를 단정 짓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곡하다.

서영옥ㆍ미술학박사 shunna95@naver.com

 

 

서정임 프로필
 
△서정임= 계명대학교 미술대학교 서양화과 학사졸업, 독일 카셀미술대학교 뉴미디어과 학사 및 석사 졸업. 대구, 베를린 등 4회의 개인전과 대구, 후쿠오카, 카셀 등 18회의 그룹전. 현재 DGIST(대구경북과학기술원) 뉴바이올로지 전공 대우교수로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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