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인 조선 광해군 때로, 우리조상들은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담배를 즐겼다고 하는데 이는 담배를 약 대용으로 썼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조상들의 담배사랑이 1907년에 이르러 전 국민의 금연운동으로 전개가 되는데, 이 운동이 바로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데로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이다.
을사늑약 이후 일제는 우리의 경제를 파탄에 빠뜨려 일본에 예속시키기 위해 한국정부로 하여금 일본으로부터 차관(국채)을 도입하게 하였고, 통감부는 이 차관을 한국민의 저항을 억압하기 위한 경찰기구의 확장 등 일제침략을 위한 투자와 일본인 거류민을 위한 시설에 충당하였는데, 1907년 한국정부가 짊어진 외채는 총 1300만원으로, 당시로서는 엄청난 액수였다.
나라가 진 빚 때문에 일제에 더욱 종속된다고 생각한 우리지역의 선각자들이 국채를 상환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1907년 1월 서상돈 선생의 제의 하에 `국채보상운동’이 대구에서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최초 `국채보상운동’을 제안한 서상돈 선생은 2천만 동포가 담배를 석 달만 끊고 그 대금으로 국채를 보상하자면서 자신부터 8백 원을 내겠다고 하였고, 이에 김광제 선생이 당장 시작하자며 석 달 동안의 담배 값을 내자 많은 사람들이 이를 따라 의연금으로 당장 2천여 원을 각출하였다고 한다.
이후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조직화되어 전개되자, 애연가였던 고종까지 금연에 참가하였고 부녀자들은 패물을 모아 보상운동에 참여하는 등 전 국민의 호응으로, 불과 운동시작 2개월 만에 4만여 명의 참여자와 230만 원 이상의 보상금을 모금하는 등 범국민적 운동으로 승화되었다.
이와 같이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일제의 극렬한 탄압과 방해로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으나,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의 1년간 애국계몽운동의 중심적 위상을 차지하는 매우 중요한 운동이 되었으며, 우리 역사 상 최초의 국민운동이었다.
반가운 것은 `국채보상운동’의 발원지인 우리고장에 내년 상반기에는 `국채보상운동기념관’이 건립된다는 것이다. 대구시 중구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내에 위치하여 조상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시민들에게 휴식공간을 제공하게 됨을 환영하면서, `국채보상운동’ 103주년에 즈음하여 나는 다시 한 번 금연을 결심한다.
최병윤 (대구지방보훈청 송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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