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한 시국의 괴로움, 글로써 수습하다
혼란한 시국의 괴로움, 글로써 수습하다
  • 김영태
  • 승인 2018.12.24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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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헌 김만호의 예술세계를 찾아서 중년시절2. 1946년(39세)~1949(42세)
화창한 봄빛을 맞았으나
왜인의 혹독한 정치에 물들어
애국지사의 민족운동을 방해하는
모리배도 무수하다
해방은 되었지만 혼란 정국은 계속됐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도 국내 정국은 안정을 찾지 못하고 흔들렸다. 신탁통치 반대 시위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좌·우익의 갈등이 심각해 지는 등 혼란 정국이 이어졌다. 우익 세력(한국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반탁(反託)운동과 반탁에서 친탁(親託)으로 돌아선 좌익(조선공산당)의 대립 양상이 심해졌다. 특히 남쪽 지역에서 심각한 좌우익의 대립이 있었다. 1946년 대구에서 발생한 10.1사건은 좌·우익 대립의 뇌관이 됐다. 참혹한 동족 살육이 자행됐다. 이 시기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좌·우익 대립 양상의 정세 속에서 선생의 감상문(해방 1주년 병술 8월 15일 감상)을 보면 다음과 같다.

 

소헌선생
소헌선생 42세(1949) 때의 사진.
◇ 광복1주년(1946.8.15)감상

「천지순환(天地巡環)은 자연의 이치이다(理自然也). 지난해와 금년의 2년은 역사의 화(華)이며 오늘은 실천에 옮길 때이다. 지난해 8월 15일은 동포 형제가 구속과 노예를 벗어나 해방된 날이요 금년 오늘은 1주년이 되는 기념일이다. 과거를 회상하면 연합국에서 자주 독립을 선사함에 해외 열사(烈士)의 피나는 노력으로 무궁화 봄빛을 가져왔지만 그러나 우리 민족은 이조 말엽의 폐습과 좋지 못한 관습이 유전(流傳)되고 왜정(倭政)의 가혹에 노예로 지내온 못난 민족이라. 화창한 봄빛을 맞았으나 흥분만 넘쳤고 왜인의 혹독한 정치에 물들어 애국지사의 민족운동을 방해하는 모리배도 무수하다.

미소공위(美蘇共委)도 휴회되고 남북이 분열되어 문화의 발전이 중단되고 경제가 침체되어 도덕과 윤리를 상실한채 감정만 악화되어 1년을 허송하고 도탄에 빠져 미래를 상상치 못하고 있다. 가슴 가득한 억울함을 밝은 정신으로 천지 신명에게 묵도하고 가슴에 쌓인 찢어진 감상은 오늘에 되살려 우리의 힘으로 영원한 8.15를 빛내자. 오늘의 현실은 실로 부끄럽고 한탄스럽다. 천지 신명에게 사과할 일 밖에 없다.

요(堯)가 순(舜)에게 전하던 윤집궐중(允執厥中)과 순(舜)이 우(禹)에게 전하던 인심(人心)은 오직 위태롭고(惟危) 도심(道心)은 오직 미약하니(惟微) 오직 정밀하고 순일(惟精惟一)함이라. 확실하게 중(中)을 잡으라는 윤집궐중(允執厥中)의 정도(正道)를 찾아가자. 이 길만 찾으면 혁혁한 융화와 목목한 질서로 하(夏)나라 때의 정전(井田)제와 주(周)나라 때의 문화를 찾을 듯 하다.

이로부터 굳은 각오로 진정한 중화(中化)의 우법(友法)을 숭상하자. 友(우)는 德(덕)이니 책선(責善)하는 우(友)를 찾도록 하자. 앞으로 같은 덕(德)으로 신의를 지내는 동지의 길을 배워 나가자. 삼천리 안에 동감인 이웃(隣兄)이 없을까? 있다면 성기상응(聲氣相應)할 줄로 자신하며 불원천리(不遠千里) 찾아가서 앞길을 밝혀 달라고 빌고자 하며 붓을 놓는다.

병술 8.15기념일 오후에 제(題)하다. 시은(市隱) 만호(晩湖) 야헌(也軒)」

좌·우익의 갈등은 통일 정부 수립의 걸림돌이 되었다. 양 진영의 갈등은 미국과 소련의 대립과 복합적으로 맞물리면서 미소공동위원회에 의한 통일정부의 수립이라는 삼상회의 결정(1945.12)은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서울(1946.3) 그리고 평양(1947.5)에서 2차의 협상을 벌렸으나 결국 결렬된 것이다. 이로서 한국문제는 유엔으로 이관되었고 유엔은 한반도에 파견할 유엔감시위원단을 설치하여 신탁통치를 거치지 않은 독립 인정과 유엔 감시 하에 남북총선거를 통한 통일 방안을 가결시켰다.

계속되는 혼란된 정국의 와중에서 1947년 선생이 40세 드는 해에 ‘정해 3월1일 기념 감상문’을 남겼다. 3·1만세운동은 선생이 소년기(12세·1919)일 때 일어났다. 감상문을 쓴 정해년(1947)은 기미3·1운동 28주년 되는 해이다. 정해년은 필자가 소헌 선생의 4남으로 태어난 해 이기도 하다. 형들도 그러했지만 필자 또한 참으로 어렵고 힘든 시절에 세상을 나왔다. 지금 필자의 나이 71세이니 그동안 시간은 유수와 같이 흘렀다. 환경은 급격하게 변하고 바뀌었지만 시국은 마치 현재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는 것은 비록 혼자 만의 생각일런지 모르겠다. 그 당시 선생이 시국을 보는 감상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감상문
1947년(40세) 에 자필 기록한 3·1절 감상문.

◇ 정해(1947년) 3월 1일 감상

「위대한 순박(大朴)이 열려서는 다시 합해지고(開而復合), 합해서는 다시 열리는 (合而復開) 것이 천지의 혼연한 이치(天地之渾然)이다. 무릇 흥망 성쇠는 나라의 대운(大運)이요 높고 낮고 귀하고 천한 것은 사람의 생명이다. 이 생명으로 이 대운을 맞이하니 운(運)은 스스로 운이요 명(命)은 스스로 명일 따름이다. 장차 어떻게 운(運)과 명(命)이 합하겠는가. 과거 기미년 3월 1일의 독립운동을 회상하면 온나라가 함께 일어났으나 명(命)이 운(運)과 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은 실패로 끝난 것이다. 이치(理)의 순서를 누가 능히 억지로 하겠는가. 사방의 수없이 많은(四九) 운(運)을 누가 점칠 것이며 남북(南北)의 분란을 그 누가 요량했을 것이며, 앞 날이 어찌될 것을 누가 말할 수 있으리오.

땅은 불과 삼천리인데 남북(南北)이 분열되고 사람은 불과 삼천만인데 좌우(左右)가 파쟁하고 있으니 어찌 정한 이치(定理)라 하겠는가. 지금의 주장은 운동(運動)에 불과한 것이니 운동은 곧 운을 움직이는 것이라. 운(運)이란 것은 조물주의 자연이요 동(動)이란 것은 생물의 이치대로이다. 이치에 맞지 않는 동(動)으로 자연이 아닌 동으로 움직이면 몸(身)은 해를 보고 나라는(國)는 이름을 잃게 되거늘 어찌하여 그 운(運)이 어떤가를 알지 못하고 움직일 수 있겠는가.

대체로 운(運)이란 보아도 보이지 않고 구하여도 얻을 수 없으니 이것을 어떻게 규정하고 어떻게 대응하겠는가. 그러한 즉 형체도 없고 자취도 없는 운(運)이 순리에 따라서 움직이면 천지에 맞는 명(命)인지라. 지금 남쪽의 미국(南美)과 북쪽의 소련(北蘇)은 이익(利)을 다투는 처지이고 혁명과 보수는 세력(勢)을 다투는 행태이다. 이익(利)을 추구하는 가운데 형세(勢)가 점차 싹트게 되고 형세(勢)를 다투는 가운데 이익(利)이 싹트게 되니 그 근본은 이익(利)이요 끝에 가서는 결국 혼란이 오게 되는 것이라.

이러한 이치로 움직이면 운(運)이 움직이지 않을 것이니 사상회의(영국, 미국, 중국, 소련)의 앞을 내다 보는 견해(先見)가 정당해서 두 나라가 사양하고 양파가 합작하여, 사리를 멀리하고 공정을 더하고, 스스로를 낮추고 남을 높이고, 승리를 추구하고 어리석음을 사랑해서, 사람이 중도(中道)로 돌아가게 되면 시대는 평화롭고 시절은 풍요하게 될 것이다.

늙은이는 사랑하고 어린이는 공경하고, 남편은 화합하고 아내는 순종하여, 하늘은 온화하고 땅은 따사롭게 되어 마을에는 가도(家道)가 흥하고, 수도에는 나라의 기풍(國風)이 번화하여 이웃나라들이 모여들 것이니, 이와 같은 정의(正義)로 운(運)을 능히 움직이는 것이 지금에 있어 마땅할 것이리라.

상주(商山)의 일개 평범한 사람(一夫)이 세상을 움직일 수가 없는 지라, 앞서 덕을 닦음이 없고 공을 닦음도 없을 뿐 아니라 하물며 나라의 큰 주인도 없고 자신의 재덕도 없으니 심히 한탄스럽고 부끄러운 일이다.

삼일절을 맞이하여 한 줄의 글을 남기지 않을 수가 없어서 스스로 자축하기 위하여 이글을 쓰노라. 정해년 음력 2월 9일 양력 3월 1일 기념. 만호(晩湖)」

◇ 대한민국 정부수립(1948년 8월15일)

해방 후 정국 안정의 선결과제는 좌우익 이념 갈등 해소와 반민족 행위 척결이었다. 이 문제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민족정기의 정통성 확립이라는 과제로 우리에게 남아 있는 듯하다. 1947년에는 유엔에서 남북 총선거를 통한 통일을 위하여 유엔감시위원단(8개국 구성)을 설치하여 한반도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북쪽은 소련 측의 거부로 입북하지 못했고, 1947년 9월 소련의 지원 하에 북쪽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하고 이듬해인 48년에는 조선인민군을 창설했다.

결국 1948년 남쪽 지역만의 총선거를 했고, 제헌국회가 구성되어 마침내 대통령 중심제 헌법을 제정 공포했다. 국회에서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 당선되었고, 그해 8월 15일 취임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제3차 유엔총회에서는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선포했다.

그러나 좌익계의 선동으로 총선거를 방해했고, 대한민국의 정부수립을 반대하는 폭동과 파업 그리고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48년 제헌 국회의원 선출 직전에 제주4·3폭동이 일어났고, 이어 10월에는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저지하기 위해 여수와 순천에 주둔한 일부 좌익계 군인들에 의해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났다. 소헌 선생은 참으로 비통하고 참담했다. 나라의 장래는 한 치 눈앞을 볼 수 없는 형국이었다.

이윽고 남한의 이러한 정치적 혼란기를 틈 타 소련을 배경으로 한 북한 정권은 마침내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소련제 전차를 앞세워 삼팔선을 넘어 남쪽을 침공했다.

김영태 영남대 명예교수(공학박사·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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