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산문화회관, ‘율산 리홍재 60년’展
봉산문화회관, ‘율산 리홍재 60년’展
  • 황인옥
  • 승인 2019.01.06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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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격적인 먹빛 예술…60년 붓끝 외길인생 총망라
신작·구작 아우른 시서화 100여점 공개
氣·人·愛…글씨 만 개 써넣은 ‘만자행’
세상에 보내는 만 번의 기도·염원인 셈
대형 붓 활용 ‘타묵퍼포먼스’ 전매특허
“인생 후반부 돌입, 앞으로도 고행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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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리홍재.

먹과 한지가 추상을 품었다. 본질을 꿰뚫는 근원으로서의 추상성과 오묘한 먹색의 내공이 넘실댔다. 먹빛 머금은 현대미술이라 칭할 만 했다. 율산(栗山) 리홍재의 신작 ‘만자행(萬子行)’ 연작이다. 작품의 장르는 단색에 한국 고유의 정신성을 담아낸 한국 단색화에 가깝다. 하지만 그는 강렬한 한 방의 반전을 선사한다. 현대미술이 아닌 규율이 엄격한 서예 작품이라는 것. 그러나 반전은 또 있다. 엄격한 서예의 절제와 규율을 가볍게 뛰어넘어 자유분방함을 즐기는 것. 이 자유분방함이 현대미술의 궤적으로 끌어들이는 핵심 요소다. 이는 율산 예술의 정수이자 그의 정체성의 요체다.

그가 “법고(法古·옛것을 본받다)를 초월해 창신(創新·새로운 것을 창조하다)을 얻었다. 법을 떠나야 법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무릇 예술은 자기만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 아니겠어요? 저 또한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이 남과 같은 예술을 하는 것이죠. 율산 고유의 서예를 위해 그 오랜 세월을 정진해 왔어요.”

◇ 법을 뛰어넘은 평생의 작업들 한자리에

율산 리홍재의 ‘명품전:율산 리홍재 60년’전이 8일부터 13일까지 봉산문화회관 1,2,3전시실과 도심명산장 4전시장에서 열린다. 지난해 60세 맞이 기념전으로 기획했지만 시국이 마뜩찮아 올해 열게 됐다는 작가의 귀띔이다. 전시에는 시서화 작품 100여점을 소개한다. 구작과 신작 등 율산의 서예 인생 전반을 총망라한다.

전시를 앞두고 율산이 전시 제목 '명품전'에 유달리 촉을 곤두세웠다. 세상의 이목에 끄떡도 하지 않는 그의 성품에 비춰보면 의외였다. ‘명품’이라는 단어의 무게가 그조차도 가볍게 뛰어넘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가 “내 작품을 내가 명품이라고 칭한 것은 건방질 수 있다”면서도 “가요에도 명곡이 있는데 서예라고 명품이 없을쏘냐?”며 ‘명품’에 대한 논리를 전개했다. 곡을 발표할 당시에 대히트를 쳤던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가 시간이 지나면서 명곡이 되듯이, 서예 작품 또한 세월의 내공이 쌓이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면 ‘명품’이 될 수 있다는 논리였다.

한자는 대표적인 표의문자다. 대상의 형상이나 추상적인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표현해 문자화했다. 이 때문에 한자 한 자로 완벽하게 의미전달이 가능하다. 형상으로부터 출발한 문자의 특징 때문에 한자는 일찍부터 서예라는 예술장르로 편입될 수 있었다. 율산은 형상에 기초한 한자의 회화 가능성에 주목했다. 신작 ‘만자행(萬子行)’은 한자 생성 당시의 형상으로의 소급이 단초가 됐다. 당시 형상을 차용해 율산 특유의 형상으로 재창조한 것.

“만자행은 기(氣), 인(人), 애(愛), 일심(一心), 불(佛), 덕(德), 진(眞), 도(道), 화(和) 등의 한자를 저만의 형상으로 재창조하거나 한글의 ‘별’을 별 모양으로 형상화 해 화폭 중앙에 일필휘지로 쓴 다음, 여백에 세필로 동일한 글자 형상을 수없이 새겨 넣으며 완성되죠.”

제목 ‘만자행’은 못해도 족히 만자(많다)는 써 넣었다는 이유에서 붙여졌다. 그는 만자를 써 내려가며 만 번의 기도, 만 번의 염원, 만 번의 정성을 화폭에 심는다. 이는 그가 세상에 보내는 기원이자 명상이다. “만자행은 33년 전에 아버님 회갑연에 부모님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면서 제작한 병풍에서 출발했죠. 33년전 병풍을 우연히 다시 보면서 5년전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이미 고인이 되셨지만 그분들의 영면을 기원하고 싶었죠. 그 기원을 ‘만자행’에 실어냈죠.”

율산의 서예가 파격이듯 그의 그림 또한 형식과 구성에서 파격이다. 그는 구름이 움직이는 ‘운해무산(雲海霧山)’을 즐겨 그린다. 거침이 없고, 걸림 없는 ‘구름’의 자유로움에 끌려 구름을 화폭에 담아낸다. ‘운해무산(雲海霧山)’에는 구름이 율산이고, 율산이 구름인 경지가 오롯이 담긴다.  “이어지는 산들 사이에 흰색 배경을 그리죠. 산을 에워싸는 흰 배경은 구름도 되고, 바다도 되고 하늘도 됩니다. 눈을 산이 아닌 배경에 집중하면 구름의 움직임이 착시효과로 나타나곤 하죠. 구름의 자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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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홍재 작.

◇ 서예는 찰나의 예술, 자신과의 싸움이 승부처

그가 서예인생 전반을 “자신과의 싸움의 연속”이었다고 회상했다. 어린시절부터 무작정 한문이 좋았고, 서예에 끌렸지만 입문 초기부터 법고보다 창신편에 섰다. 굵직한 스승을 모시지 않은 것도 법에 얽매이는 것을 경계한 때문이다. 그의 선구자적 면모는 젊은시절부터 두각을 드러냈다. 그는 서예 퍼포먼스나 캘리그라프, 문인화의 파격, 서예와 음악·춤·스포츠와의 융합을 시도했다. 보수적이었던 당시의 세태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조합들을 그에 의해 거침없이 시도됐다. 전통에 대한 엄숙성을 고수하던 서예의 전통에서 보면 그는 이단아였고, 그래서 늘 외로웠다. 초기에는 율산의 서예에 색안경을 끼고 보던 세상도 이제는 그의 내공에 머리를 숙인다. 그가 “타고난 재주보다 노력의 결실”임을 강조했다.

“법고에 열심이지 않았다면 법고를 뛰어넘을 수는 없었을 것이에요. 평생 치열하게 작업에만 매달렸고, 그 결실로 창신을 이룰 수 있었어요.”

율산이 개척하다시피 한 대표적인 분야는 퍼포먼스다. 서예 퍼포먼스는 붓으로 글씨를 치는 ‘타묵(打墨)’을 기본으로 한다. 붓과 몸이 일체가 되어 한지 위를 마치 춤을 추듯 글씨를 친다. 고도의 집중력과 감성으로 단숨에 써 내려가는 서예의 찰나성에 동(動)적인 면을 부각한 행위다. 붓이 노래하고 먹이 춤추는 행위와 흡사하다. 타묵 퍼포먼스는 일종의 서예의 공연 형식화에 해당된다. 관람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형붓으로 일필휘지로 글자를 써내려 감으로써 대중들에게 서예의 매력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행위 예술이다.

“퍼포먼스는 큰 붓을 즐겨 쓰는 특성 때문에 시작됐다”고 했다. “서예도 음악처럼 고저장단이 있어요. ‘필가묵무(筆歌墨舞)’이죠. 서예를 모르는 일반인들에게 서예의 온전한 감동을 느끼게 하기 위해 그 찰나의 치는 과정까지 보여주고 있어요.”

취중진담이 있다면, 취중예술도 있다. 율산은 흥이 거나하게 오를때 그 흥취를 작품에 잡아내는, 이른바 취중서예를 즐긴다. 이번 전시에 걸린 작품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취중에 탄생했다. 그가 “술에 취하지 않았더라도 취기의 흥을 자주 끄집어내곤 한다”고 했다. 이유는 취중에 무한자유의 경지로 들어가기 때문. 바로 몰아의 경지다. 그가 찰나 예술론을 펼쳤다. “서예는 예술 장르 중에서 가장 높은 경지라고 생각해요. 음악이나 무용 등 어떤 장르와도 융합될 수 있는 포용성을 가졌죠. 서예가 시공이 없는 찰나의 예술이 가능한 것도 포용성 때문이라고 봐요.”

율산은 20대에 미술제 사상 최연소 추천작가로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을 시작으로 40세인 1996년에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예부분 초대작가로 심사위원을 역임하고, 1989년에는 매일서예대전 초대작가회 초대회장을 역임했다. 이후 2000년부터는 대구·경북서예대전 초대작가 심사·운영 위원 등으로 활동을 하며 존재감을 키워왔다. 그런 그가 지난해 이순을 넘겼다. 그도 이제 인간 수명 100세 시대의 인생 후반부에 접어든 셈이다. 그가 ‘진고장락(眞苦長樂)’을 언급했다. 자신의 예술인생에 대한 함축적 표현이었다.

“예술은 고행 없이는 경지에 이를 수가 없어요. 치열한 고행 끝에 즐거움이 찾아오는데 그런 경지의 즐거움이라야 오래가지요. 예술가는 고행을 자처해야 합니다. 이순이 지났다고 느슨할 수 없지 않겠어요? 저의 고행은 앞으로도 쉼없이 계속될 겁니다.”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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