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 갔다 돌아오니…재가 된 습작들
피난 갔다 돌아오니…재가 된 습작들
  • 김영태
  • 승인 2019.01.07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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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군 총탄 피해 선산에 자리
두 달만에 상주로 귀환했을 땐
약장·약재, 서책·문갑 불타고
손때 묻은 천자문까지 사라져
마을 어려운 일 수습 앞장서고
폐허같은 마음은 서도로 치유
46세 되던 해, 자녀 교육 위해
상주 떠나 대구로 이주 결단
소헌선생-일신우일신
소헌선생 70세(1977)때의 작품 ‘日新又日新(일신우일신)’

 

소헌 김만호의 예술세계를 찾아서 <8>중년시절3.  1950년(43세)~1953(46세)

◇ 6.25전쟁, 피난생활

해방을 맞이하고 마침내 염원하던 대한민국 정부(1948.8.15)를 수립하였지만 2년을 넘기지 못하고 6.25전쟁이 발발했다. 해방정부 수립 2년이 채 안되던 시기에 좌·우익 대립의 정치적 혼란기를 틈탄 북한 정권이 소련을 배후로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에 삼팔선 남쪽을 침공하였다. 북한은 소련제 전차와 대포를 앞세운 총공세로 3일만에 서울을 탈취하였다. 북한의 침략 소식이 처음 전해 졌을 때 사람들은 국부적인 북한의 도발 행위로 간주하였으나 정부가 대전으로 옮겨졌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사태를 심각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유엔군의 참전이 결정되는 동안 인민군은 호남과 왜관, 영천 등지로 쳐내려 왔다. 유엔군이 참전(1950.7.2)하면서부터 전쟁은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의 대결 양상으로 바뀌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제서야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내리고(1950.7.8) 정부를 대구로 옮겼다(7.16). 매일같이 남쪽으로 밀려오는 피난민이 넘쳐 식량과 주거 문제로 곳곳에서 아우성이었다.

6.25동란 당시 선생의 나이는 43세 되던 중년의 가장(家長)이었다. 선생의 가족도 인민군의 총탄을 피해 피난을 해야 할 수밖에 없었다. 가족을 데리고 군위를 거쳐 선산 쪽으로 피난 길에 나섰다. 인민군의 폭탄과 총알이 가히 소나기가 오듯이 쏟아 졌다. 왜관 철교가 폭파되고 낙동강 도강(渡江) 방지로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고 선산에서 어려운 피난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집 저집에서 걸식의 생활이었다. 선산으로 피난가던 4살의 필자는 사촌누님의 등에 업혀서 갔다고 하는데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선산 피난 때 동리 마당에 있는 감꽃을 주워 먹고 허기를 채웠던 기억이 있다.

8월 중순 유엔군 총사령관인 맥아더장군의 지휘로 마지막 방어선인 낙동강 전투에서 국군이 승리하고 반격전이 시작되자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되었다. 선생의 가족은 두 달 만에 상주로 귀환했다. 그 때 선생의 비망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1950).

「집안의 큰집 작은집 합동하여 남자는 등에 짐을 지고 여자는 짐을 머리에 이고(大小家合同男負女載) 피난가는 광경은 이루 말로서 형언할 수가 없구나(出發時光景不可形言). 비행기 습격으로 쏟아지는 폭탄과 총탄을 뚫고 선산으로 가서 낙동강을 넘으려하니 인민군합도방지책(人民軍合渡防止策)으로 도강차단(渡江遮斷)되어 부득이 가족을 데리고 가가촌촌(家家村村) 걸식(乞食)하며 2개월 만에 청리(靑里)로 돌아오다」

피난생활 두 달 후 상주로 돌아온 선생은 하늘이 무너져 내린 듯한 충격과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동안 집을 비워 둔 사이 약장(藥欌)과 약재(藥材)는 물론 그 많은 서책과 문갑 등 그토록 귀중히 여기던 손때 묻은 집기들이 퇴각하는 인민군에 의해 깡그리 불에 타 없어졌다. 그보다 더 큰 안타까움은 그동안 연구한 기록과 습작한 작품들이 재도 찾을 길 없이 사라진 것이다. 마치 신체의 일부가 잘려 나간 것 같은 쓰라림이었다. 어릴 적부터 아껴오던 손때 묻은 천자문하며 대판서도전 상장 등… 생각하면 할수록 울분이 터졌다. 지난 세월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린 허탈감과 좌절감에 사로잡혀 헤어나기가 힘들었다.

4세이던 필자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어머니가 장롱에 귀하게 간직했던 비단이 갈기갈기 찢겨져 마루에 어지럽게 늘려져 있던 광경, 보물같이 다루었던 유성기(留聲機)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던 자전거(自轉車)가 도끼자국으로 파손된 채 미나리광에 쳐 박혀 있었다. 이때 부모님의 낙심은 어떠했겠는가 가히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유성기와 자전거는 대구 이주(1953) 후 필자가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도 있었는데 그 후 언제 없어졌는지 모르겠다. 초등학교 어린사절에 깨어진 LP 레코드판을 유성기에 틀어놓고 형과 함께 듣고 또 듣고 했던 ‘반월성 넘어 야자수 보니---’(낙화삼천,김정구노래,1942)의 소리가 아직까지 기억에 삼삼하다. 어딘가에 보존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전쟁의 양상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했다. 전쟁 발발 후 맥없이 무너졌던 수도 서울을 같은 해 9월에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1950.9.28)으로 3개월 만에 수복하였고, 여세를 몰아 파죽지세로 북진하여 10월에 평양을 거쳐 압록강에 이르렀고, 11월에는 두만강까지 진격하는 반격을 하였다. 그러나 환희도 잠시, 또 다시 전쟁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국토통일을 눈앞에 둔 시점에 중공군이 인해전술(人海戰術)로 전쟁에 개입하였고, 많은 사람들은 흥남부두에서 미군의 군함으로 월남(1950.12.14~24)하여야 했다. 급기야 국군은 1.4후퇴(1951.1.4)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일진일퇴의 장기전 양상에서 정전회담(1951.7)이 시작되고 53년에 휴전협정(1953.7.27)이 체결되면서 발발 1년여 만에 전쟁은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3년 1개월간 민족상잔의 처참한 전쟁은 국토를 유린하고 수많은 인명 피해를 낳았다. 국군과 민간인 100만명 이상, 연합군 18만여명(이중 미군이 16만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부산을 제외한 전 국토가 초토화되었다.

◇수습 재기, 한해 폐농

전쟁의 상처는 소헌 선생에게도 비껴가지 않았다. 민족의 너무나도 엄청난 비극 앞에 선생 역시 깊은 좌절감을 맛보아야 했다. 의원은 완전 폐업된 상태였고, 가족들의 보금자리는 적들의 유린으로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그러나 시련은 더 큰 또 하나의 의욕과 새로운 창조를 낳는 위대한 어머니라고 하였다. 선생은 폐허를 딛고 분연히 다시 일어섰다. 하늘을 우러르며 ‘저 푸른 빛은 언제나 가시지 않는다’라고 외치며 파괴된 가옥을 복구하고 밖으로는 면내(面內)의 모든 복잡한 일들을 선두에 나서서 수습해 나갔다.

선생은 늘 그러했듯이 그 폐허의 아픔과 쓰라림을 붓으로 달래었다. 상처가 크면 클수록 붓은 더욱 절실한 친구였고 묵향은 쓰라림을 치료해 주는 더없이 좋은 비방(秘方)이었다. 그러는 한편 51년 신묘년에는 농토를 더 매입해 확장하고 농사일에 열중했다. 새 생활에의 기대를 농작에 맡기고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그러했지만 시련의 노도는 너무나도 끝이 없었다. 51,52,53년 내리 3년 동안 극심한 한해(旱害)와 병충해(病蟲害)로 대흉년이 들었던 것이다. 농사는 완전히 실패하고 농토는 엉망진창이 되었다. 식량 사정은 날로 악화되었고 급기야 유엔의 식량 원조 물자로 생계를 의존할 형편이 되었다.

선생은 다시 새 삶의 길을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초승달도 구름에 갇히어 어둠만이 가득한 폐농의 길을 걸으며 선생의 가슴은 착잡하기만 했다. 그 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1953).

「一下人間萬像侵 (일하인간만상침)

玄機微杳政難尋 (현기미묘정난심)

貪利終隨身上害 (탐리종수신상해)

安貧自有樂中吟 (안빈자유낙중음)

行步常想危片地 (행보상상위편지)

發言豫愼重千金 (발언예신중천금)

平生眞路何求遠 (평생진로하구원)

渡世百年卽在今 (도세백년즉재금)」

‘인간은 태어나면 삼라만상으로부터 침입을 당하고, 세상 미묘한 이치는 옳은 길 찾기가 힘들구나. 이익을 탐하면 몸에 해가 따르기 마련이고, 안빈하면 즐거울 수가 있다.

한발 디디는 일을 조각 땅 밟듯 두려워 하고, 말 한마디를 천금같이 두려워 하라.

평생의 참된 길을 먼데서 구하겠는가, 바로 지금에 있다.’

연이은 폐농은 선생이 다시 일어서는데 큰 타격을 주고 있었다. 의원의 재기도 힘들었다. 선생은 착잡하고 우울한 나날을 보내며 서도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그러했지만 앞으로의 생계와 자식들의 교육문제를 생각하면 마냥 서도에만 매달려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야 했다. 자녀의 교육문제는 큰 과제였다. 초등학교까지는 시골에서 학업을 하더라도 상급학교의 진학은 문제가 컸다. 도시로 진출해야만 자녀들의 교육에 지장이 없다는 판단이 섰다. 그러나 이를 박차고 일어서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궁리 끝에 일단 시골생활을 청산하고 떠날 결심을 했다. 몸 담아 왔던 상주를 떠나 새로운 현실과 부닥치며 극복해 나갈 결단을 하고 이주하기로 한 곳은 대구(大邱)였다. 선생의 나이 46세 되던 해(1953년)였다. 막상 짐을 꾸려 떠날려니 선생의 심정은 상주에서의 생활이 뇌리를 스치며 감개무량하게 다가왔다. ‘복잡한 역사의 변천을 겪으면서 40년 간 상주에서 힘든 시대를 용하게 살아왔구나’ 하는 깊은 감회에 젖었다.

김영태 영남대 명예교수(공학박사,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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