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루를 잊은 각다귀
며루를 잊은 각다귀
  • 승인 2019.01.13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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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윤 시인
미국의 작가 진 웹스터(Jean Webster)가 1912년에 발표한 소설 ‘키다리 아저씨’의 원제가 Daddy Long Legs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알려진 바와 같이 진 웹스터는 ‘톰 소여의 모험’의 작가 마크 트웨인의 조카손녀이다. 있는 그대로 제목을 번역을 하면 ‘각다귀’다. 소설 속의 주인공 주디가 후원자인 키다리 아저씨의 그림자를 보고 지어준 별명이 각다귀다. 각다귀는 익충보다는 해충에 가깝다. 성충이 되면 모기와 비슷한 외형이나, 사람의 피를 빨아먹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해충인 이유는 유충일 때의 해악 때문이다. 각다귀의 유충을 며루라고 하는데, 식물의 뿌리나 농작물의 뿌리를 잘라 먹는 패악(悖惡)을 저지른다. 성충이 되면 짝짓기와 산란 외에는 크게 피해를 주는 일은 없다. 물론 키다리 아저씨에서 각다귀는 우호적인 의미다. 주디가 각다귀를 발견하고 죽이려다가 아저씨가 생각나서 그냥 아버리는 장면을 봐도 그렇다. 과거에는 해충이었지만, 날개를 다는 순간부터 크게 해를 끼치는 부분은 없다. 각다귀는 그런 존재다. 그런 각다귀와 같거나 비슷한 사람이 많다.

2018년 1월 11일 사법부의 수장이었던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검찰에 피의자신분으로 소환되었다. 사법부의 적폐를 청산할 수 있는 기회라고 보는 진보 측과, 전 정권에 대한 정치보복으로 보는 보수 측이 강경하게 대치하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무력충돌은 없었지만, 양측 모두 불씨를 탑재한 일촉즉발의 분위기였다. 양쪽에서 현수막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적법한 처리를 요구하고 있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검찰청의 포토라인을 거부하고 대법원 앞에서 5분간의 기자회견을 가졌다. “모든 것이 저의 부덕의 소치로 인한 것이고 따라서 그 모든 책임은 제가 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하면서도 “사건에 관련된 여러 법관들도 각자의 직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양심에 반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고 하고, 저는 그 말을 믿고 있습니다” 라고도 했다. 그는 유죄인가. 무죄인가. 그의 말대로라면 지은 죄가 뭔지는 모르겠으나, 만약에 죄가 있다면 책임을 지겠다는 뜻으로 볼 수도 있다. ‘양심’에 반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표현이 내내 가시처럼 걸렸다. 사법부의 양심이 곧 정의라는 것에 대한 필자의 ‘불신’이 남은 탓일까. 역대 대통령은 물론이고, 검찰 수사에 참석한 이들 중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었던 검찰청 포토라인을 그는 보란 듯이 패싱(passing)하고 지나갔다. 전 직장이었던 대법원 앞에서 당당하게 인터뷰를 할 수 있다는 패기도 보여주었다.

세상에 ‘갑’과 ‘을’만이 존재한다면 의외로 평온할 것이다. 갑을의 관계는 필요에 의해서 형성이 되는 경우가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학연이나 혈연의 관계는 양측 모두에게 질서유지의 당위성을 가진다. 그 질서의 바퀴는 누가 굴리는 걸까. 수레를 끌어주고 밀어주는 이는 수많은 ‘병’과 ‘정’들이다. 그렇다면 병정은 무슨 이유로 갑과 을의 수레에 힘든 노동을 제공하는 것일까. 이유는 단순하다. 수레는 ‘갑과 을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국가의 미래가 실린 수레이기 때문이다. 갑을에 대한 믿음이 원동력이 되어주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한때 ‘금 수저’와 ‘흙 수저’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어떡하겠는가. 누군들 고관대작의 집안에 나기를 원하지 않았겠는가. 그렇다고 운명론적 회의론에 동조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절대적인 ‘갑’이나 ‘을’은 존재할 수 없다. 누군가에게 ‘갑’인 자도, 누군가에게는 ‘을’일 수밖에 없음은 자명한 일이니 말이다.

과거를 잊고 살아가는 각다귀들이 많다. 거짓이 거짓을 덮고, 거짓이 비대해지면 마침내 오욕이 되는 법이다. 실수에는 책임이 따른다. 그 책임이 두려워서 실수를 부정하면 파렴치(破廉恥)한 사람이 되고 만다. 며루였던 시절에, 곡식들의 싹을 틔우지 못하게 저질렀던 잘못을 날개를 달았다고 해서 부정하면, 우리는 불가피하게 각다귀들을 살충(殺蟲)할 수밖에 없다. 본인이 저질렀던 만행을 다른 이들에게 무용담으로 전하는 자들은 구제가 힘들다. 학교폭력의 가해학생들이 자신들의 폭행동영상을 배포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민주화에 불을 지핀 대표적인 가해자를 구국의 등불로 묘사한 망언도 병세가 심각하다고 볼 수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 대한 판결은 법의 심판에 따르면 그만이다. 아직까지 정황들만 추측해볼 뿐, 진실이 밝혀진 바는 없다. 한편, 재임당시 위안부협정을 앞두고 그가 ‘강제징용 소송 시나리오’를 수렴청정(垂簾聽政)했다는 의혹이 ‘사실’로 드러날까 봐 두렵다. 권력은 언제나 유한(有限)하다. 법의 잘못된 심판이 누군가에게 한(恨)으로 남을 수도 있음을 잊어선 안 된다. 고령의 위안부와 강제 징용 피해자가 평생을 두고 겪었을 고통과 피해는 감히 가늠해볼 수조차 없다. 이번 검찰 수사를 계기로, 소신껏 헌법을 수호했다던 그가, 폭정에 항거하고 재판에 임한 정의로운 사례들이 드러나기를 바라는 마음도 없잖아 있다. ‘꽃길’을 걸어온 자에게는 드문 일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정의(正義)를 정의(定義)내릴 수 있는 기준은 오직 ‘자신의 심장’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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