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면허로 개원 못 해 48세 때 국가면허 취득
일제 면허로 개원 못 해 48세 때 국가면허 취득
  • 김영태
  • 승인 2019.01.21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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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세, 상주생활 접고 대구에 둥지
국시 합격 후 대봉동 한의원 개원
경북한의사회·한의사협회 활동
한학자·서예동호인과 교류 확대
대구 생활 8년 만에 가옥 마련
1층엔 한의원·주택 2층엔 서실

소헌 김만호의 예술세계를 찾아서<9>-중년시절4. 1953년(46세)~1960년(53세)

◇대구 이주

소헌 선생이 중년을 맞으면서 큰 변화가 찾아왔다. 계축년 새해에 대구로 이주하기로 결심하면서 선생의 40년 대구 생활이 첫 발을 내딛게 됐다. 그 시기 선생에게 가장 중대한 일은 자녀교육이었다. 지난 몇 년간의 폐농도 그러했지만 자녀교육 문제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지상과제였다. 그동안 일구어 놓았던 농지와 가옥을 그대로 남겨 두고 계축년 정초(正初), 선생은 바람찬 차가운 날씨에 대구 이주를 감행했다. 그가 식솔들을 이끌고 첫 발을 디딘 곳은 약령시장이었다. 선생의 상주 생활 청산과 도시로의 이주는 어쩌면 은거일 수도 있었다. 치욕적인 일제의 압박과 처참한 민족상잔의 동란, 혼란된 정국의 와중에서 살아온 청년시절의 시공간을 뛰어넘어 도시 저자거리에서의 새로운 삶을 택한 것이다.

상주농잠학교에 재학 중이던 장남(相大)은 상주에서 계속 학교를 다니게 하고, 나머지 자녀들의 대구 입성은 비교적 성공적이었다. 차남(榮秀)이 대륜중학교 입시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고, 3남(榮植)도 같은 학교에 입학을 했다. 4남(榮泰)인 필자는 당시 6살이었고, 5남(榮俊)은 1살의 어린아이였다. 막내인 6남(相吉)은 그 후 57년에 대구에서 출생했다.

첫 3개월 동안의 대구 생활은 곤궁함이 이를 데가 없었다. 집과 토지를 백형(伯兄)에게 고스란히 넘겨주고 빈손으로 4형제를 데리고 대구로 와 남성로 약전골목에 방 하나를 빌려 거처를 마련했다. 3개월의 단칸방 생활은 몹시 불편하고 복잡했다. 한 칸 방에 한가족이 살아야 하는 그 골몰을 감당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필자는 그 때의 기억을 문득문득 갖고 있다. 그 해 화폐개혁(1953.2.17)이 있었는데 어머니에게 새 돈을 하나씩 받아쥐고 기뻐 날뛰었던 기억이 새록하다. 3개월 후에야 신천동에 새 가옥을 마련하여 이사를 하였다. 우리 형제들은 큰 집으로 가는 사실에 신이 났다. 필자는 다음해 거기서 어머니 손을 잡고 국민학교(삼덕초등)에 입학을 했다.

◇의원 개원

이사한 대구 신천동 3구(1199번지)에 자리를 잡은 선생은 중화의원(中和醫院)이란 간판을 걸고 한약방을 겸한 의원을 개업했다. 그런데 여기서 큰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일제의 면허는 이전이 불능이라는 것이었다. 부득이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장소를 옮겨(399번지) 상주한약방(尙州漢藥房)으로 개칭하여 한약종상 면허로 약국을 개업하려 시도했으나 이것 역시 불가능하였다. 다시 면허시험을 치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한의학 대학이 없었고 오직 독학으로 다시 공부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이 50고개를 바라보며 수험공부를 한다는 것은 여간한 고통이 아니었다. 생계의 위협에 마주치면서도 오직 수험준비에 전력을 다했다. 당연히 서도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각고의 노력 끝에 55년 48세 때 외과와 내과, 소아과, 부인과 등 6과목의 한의사 국가시험에 무사히 합격하여 면허증을 취득했다.

다시-상주한의원-간판
1956년(49세)에 자필 제작한 「상주한의원」 간판.

다음 해 56년 병신년에 수성천 방천 둑과 삼덕동과의 경계 지점인 대봉동(현재 김광석거리 입구)의 가옥(한성기 소유)을 임대하여 상주한의원(尙州漢醫院)을 개업했다. 늘그막에 두 번째 한의사 면허시험에 통과했을 때의 감회가 이루 말할 수 없이 깊었지만 오랜 시련 끝에 한의원 간판을 걸었을 때의 심정은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감개무량했다. 의원의 위치는 수성교 방천시장 입구였다. 그 당시 방천시장은 서문시장과 함께 대구에서 널리 알려진 큰 시장이었다. 의원이 자리가 잡히고 처방의 효험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자 환자들이 줄지어 몰려들었다. 선생의 신통한 비방(秘方)이 각지에 퍼져 소문이 난 것이다. 방천시장에 있는 용한 의원의 이미지로 부각되었다.

경북한의사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회원들의 친목 도모와 권익을 향상시키는 일에 열성적인 활동을 했다. 1957년에는 한의사협회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한의원에는 김석환, 김 도 제씨 외 일족의 방문이 잦았고 한학자와 서예동호인들이 알게 모르게 찾아오기 시작했다.

58년에 재구(在邱) 의성김씨 청송파친목회(현 道松會)를 조직하여 회장직을 맡아 일족의 길흉사 상부상조에 힘을 쏟았다. 또한 그해 백형의 회갑(10월16일)을 계기로 형제가 합의하여 상주에 있는 선고와 선비의 산소에 상석(床石)을 마련하는 등 많은 일들을 도맡아 했다. 대구의 생활은 무난하게 정착되어 틀이 잡혔고 자녀들의 교육문제도 순조롭게 안정되었다.

생활이 안정됨에 따라 서도에의 정열은 또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그동안 어려움 속에서도 하루도 빠짐없이 수불석필(手不釋筆)로 붓을 놓지 않았으나 그래도 마음 한구석엔 정진하지 못하는 아쉬움과 허전함이 늘 선생을 괴롭히고 있었는데, 마치 휴화산의 용암이 다시 터져 오르듯 서도에의 정열이 솟구쳐 올랐다. 다시 서법(書法) 연구에 몰두하고 밤 깊어가는 줄 모르고 붓을 잡고 시름했다. 선생은 유가(儒家)의 가풍을 바탕으로 거기다 또 서도(書道)에서 인간의 정신과 예도(藝道)의 깊이를 인술(仁術)에 활용하면서 보람찬 내일을 기약하고 있었다.

◇건물 신축 이전

그러던 중 그해 추석 명절(1959.9.30)을 기해서 태풍 사라호가 덮쳤다. 가옥과 농경지가 물에 잠기고 곳곳의 도로가 유실되고 교량이 파손되었다. 그 당시 필자의 나이가 12세였다. 수성천이 범람하기 일보 직전이었고 온갖 가재 도구와 소, 돼지 등의 가축들이 거센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 오는 것을 목격했다. 정말로 가관이었다. 가로수가 수없이 쓰러지고 간판이 바람에 휘날려 떠돌아 다녔다. 해방 후 가장 큰 규모의 태풍이었다. 막대한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가 있었다. 다행히 대봉 언덕은 대구의 높은 구릉이라 큰 피해가 없이 지나갔다. 이듬해인 1960년은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였다. 자유당 정권의 장기 집권을 위한 선거를 앞두고 2월 28일 대구 수성천변에서 야당(野黨)의 부통령후보인 장면 박사의 연설회가 잡혀 있던 날이었다. 이날은 일요일이었다. 참석을 저지하기 위해 대구시내 고등학교에 일요일 등교 지시가 내렸다. 일요일 날 등교한 경북고등학교 학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중앙통과 도청, 시청, 자유당 당사를 돌며 자유당 정권을 규탄했다. 필자는 갓 중학교(경북중) 1학년에 입학한 어린 학생이었다. 대구시내 8개 고등학교 학생 1,200명이 참여했다. 그러나 3.15부정선거는 자행되었고 이윽고 마산에서 일어난 학생시위가 도화선이 되어 전국의 시민과 학생들이 총궐기한 4.19혁명이 일어났다. 결국 1960년 4월 26일 이승만은 대통령 직에서 하야하고 그로서 자유당 정권은 무너졌다.

이렇게 혼돈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소헌 선생은 지난해 매입해 두었던 대봉동 1구(12의 16번지)의 부지에 새 건물을 신축하였다. 수성교 대로변 방천시장 입구 대봉언덕(鳳岡)에 자리잡은 목조2층 건물이다. 1960년 이른 봄이었다. 대구생활 8년 만에 자신의 가옥을 마련한 셈이다. 상주한의원(尙州漢醫院)을 이전하고 한의원과 주택은 1층에 두고, 2층에 서실을 마련하였다.
 

소헌기-현판
1960년 소헌은 목조 2층짜리 가옥을 만들었다. 당시 문소 김동섭 선생이 기록한 「소헌기」 현판.

◇소헌기(素軒記)

신축 건물에는 문소(聞韶) 김동섭(金東燮)선생이 기록한 소헌기(素軒記)를 현판으로 남겼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1960).

「무릇 선비란 세상이 다스려지면 조정에 숨고 세상이 어지러우면 저자에 숨는 법이다. 이것은 천하고금의 사람들이 자기의 소박한 위치에서 소박한 본분을 행하는 이치로서 필연적인 이법(理法)이다. 그러나 세상사람들은 생활과 영리의 길에 매몰되어 염치를 잃어버리고 도의에 어긋나게 종종 본분을 행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있어서 탄식할 일이다. 나는 일찍부터 사방에 소박(素朴)한 사람을 구하고자 했으나 한탄스럽게도 얻지 못하다가 근래에 와서야 이 지방에서 한사람을 만났으니 그는 족조(族祖) 만호(萬浩)씨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집안이 소박하고 청한하였으니 평소에 뜻을 굽히지 아니하고 몸소 부지런히 일하면서 본래의 소박한 마음(素心)을 잃지 아니하였다. 이미 섬나라 일본이 우리나라를 약탈한 후에 저자에 숨어 살겠다는 의지로 상주(商山)에서 영남의 대도시인 대구(達丘)에 터를 잡아 이주하여 봉강(鳳岡)고개에 2층 집을 짓고 소헌(素軒)이라 이름했으니 이는 회사후소(繪事後素, 흰 바탕에 그림을 그리는 일)의 공자 말씀에 그 뜻을 취한 것이다. 책을 읽을 때는 성현의 경전과 경재잠(敬齋箴) 백록동규(白鹿洞規) 등의 서책을 보고 글씨를 쓸 때에는 왕희지(王羲之) 구양순(歐陽詢) 안진경(顔眞卿) 유공권(柳公權)을 서예의 법으로 삼았으니, 오늘이 이와 같고 내일도 또한 이와 같으니 장차 앞으로도 이와 같으리라. 진실로 그 뜻을 독실히 행하고 자기 본분에 충실한 사람이 아니면 어찌 능히 이와 같이 할수 있겠는가. 봄날 새옷이 마련되면 몇몇 동지들과 용계(龍頭溪谷)의 상류에서 몸을 씻고 평소의 소회를 논하며 즐기면서 돌아오기를 잊었느니라. 해가 지고 달이 돋게 되면 시를 읊고 세상의 영욕을 잊으니 어찌 혼탁한 세상에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다만 시인 묵객의 취미만 가지고 세월을 보내는 것은 입과 귀로만 외우는 시장의 학문에 불과한 것이다. 그는 사서(四書)와 육경(六經)에 뜻을 두어서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의 공부를 하였으니 아마도 진실된 유학도이다. 나는 일찍부터 그를 만났는데 조용히 말하기를 이집(軒軒)에 대한 기문(記文)을 주면 조석(朝夕)으로 보며 반성하는 자료로 삼겠다고 하기에, 내가 이르기를 스스로 밝게 알면서 어찌 어둡고 귀가 먼 사람에게 듣기를 원하는가라고 말했다. 그랬지만 훌륭한 뜻을 져버리기가 어려워 하잘 것 없는 글을 적어 기록하는 바이다. 경자(1960) 중춘상완 족손 동섭 삼가 적다(更子 仲春上浣 族孫 東燮 謹記)」

김영태 영남대 명예교수(공학박사,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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