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동짓달 긴긴 밤에
[문화칼럼] 동짓달 긴긴 밤에
  • 승인 2019.01.23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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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국(수성아트피아 관장)



우리 역사를 여신 분의 어머니께서는 쑥 한 심지와 마늘 스무 개를 먹고 삼칠일 동안 몸을 삼가 인간으로 탄생하셨다. 황진이는 “동짓달 긴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어”라고 노래했다. 기나긴 겨울 밤, 님 만 그리워 할 것이 아니다. 나도 삼칠일 몸을 삼가 사람이 되신 그분처럼 이 겨울에 자신을 위해 뭔가 견뎌보는 시간을 가져보고 싶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머큐리가 동명 제목의 이곡에 대한 구상을 밝히자 너무 길다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이 제작자의 반응 이었다. 이것이 당시의 문법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예술을 감상함에 있어 진득하게 대하지 않는다. 우선 귀에 쏙 들어오고 눈에 확 띄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은 음악엔 왠지 눈길이 잘 가지 않는다. 입으로 잘 넘어가는 맛난 음식만 먹을 게 아니다. 밍밍한 것 같지만 씹을수록 깊은 맛이 나는 음식도 많다. 음악도 마찬가지, 말랑말랑하고 달달한 음악만 맛있는 것이 아니다.

대하는 자세도 그렇다. 일할 때 음악을 틀어놓고 듣는 것도 좋다. 하지만 음악은 음악만 집중해서 듣는 것이 좋다. 그럴 때 안 들리던 것이 들리고 보지 못하던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긴 호흡으로 전곡연주를 들어보자. 이는 우리에게 묵직한 감동을 준다. 또한 연주자에게는 음악적 기초체력을 길러준다. 전곡연주에 있어서는 연주자가 넘기 힘든 부분이 반드시 나타나게 된다. 쉽게 정복할 수 없다. 이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작품에 대한 깊은 통찰과 더불어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고통을 통하여 연주자는 성장하고 관객은 그것을 나누어 가지게 된다.

몇 년 전 북경 국가대극원에서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의 연주회가 열렸다. 손가락 부상에서 돌아온 그가 선택한 것은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전곡 연주였다. 내가 목격한 중국 관객들의 음악회 감상 태도는 결코 모범적이 아니었다. 공연 중 스마트 폰을 만지는 관객이 너무 많다. 그래서 이를 일일이 직접 안내 할 수가 없이 각층마다 레이저 빔으로 제지하는 공연 안내원이 두어명씩 배치되어 있을 정도다. 그런데 연주 시간만 두 시간이 넘는 이날 정경화 음악회에서는 다른 때와 달리 관객들은 정말 집중해서 음악을 감상하였다. 모든 연주가 끝나자 돌아온 여제에게 바치는 뜨거운 환호와 함께…

과거 이전 극장에서 일할 때 백건우 초청 독주회를 개최 한 적이 있다. 그는 좋은 위치와 소리를 찾기 위한 몇 시간의 리허설 동안, 피아노 위치 조정 외에 다른 아무런 요구 없이 묵묵히 피아노만 쳤다. 함께 식사 하는 동안에도 낮고 조용히 그리고 따뜻한 목소리로 몇 마디 말만했다. 그는 음악으로 모든 것을 표현하기에 많은 말이 필요 없는 것 같았다. 이처럼 진중하고, 고요히 내면을 바라보는 ‘건반위의 구도자’백건우는 한 작곡가의 작품을 집중 탐구하여 연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백건우는 2017 ‘끝없는 여정’이란 타이틀로 십년 만에 다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를 열었다. 그는 “베토벤은 아무리 거듭해도 늘 새로운, 끝없는 여정과 같다”고 했다. 이때 그의 나이 일흔 한 살. 이 작품은 우리가 익히 아는 월광, 열정 그리고 비창을 비롯한 32개의 소나타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의 소나타는 대부분 3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니까 백 개 가까운 곡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을 전국투어를 제외하고도 서울에서만 칠 일간 여덟 번에 걸쳐 연주 했다.

대가의 이러한 모습을 흉내라도 내보고 싶다. 동짓달 긴긴 밤 진득하게 베토벤의 작품을 듣고 싶다. 지금부터 하루에 소나타 한 개씩 1번부터 32번까지 매일 듣고 싶다. 한번만 들어도 겨울은 다 지나가겠지. 세 번쯤 들으면 봄은 제법 무르익었을 것이다. 이러노라면 “베토벤은 숭고의 의미를 끝까지 붙들었던 사람”이라는 말을 조금이라도 이해 할 수 있을까? 베토벤의 피아노 소리에 귀 기울이면 “베토벤이야말로 인간의 모든 문제와 다양한 감정의 폭을 음악으로 표현한 인물”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까?

무라카미 하루키는 “산을 내려옴과 동시에 나의 귀는 그때까지 줄곧 감지해오던, 뭔가 남몰래 간직해왔던 은은한 메아리 같은 걸 상실해버린 듯했다”고 말했다. 그날 그곳, 그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무엇에 대한 이야기다. 다만 오감을 열어야 가능할 것이다. 베토벤의 음악에서 이런 특별함을 감지해내고 싶다. 마음을 열고 고요히 듣노라면 다 이해하지 못하고, 다 느끼지 못하더라도 그 빛을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속에 이 겨울밤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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