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시장 결집한 1천 군중…청라언덕 넘으며 “독립 만세”
서문시장 결집한 1천 군중…청라언덕 넘으며 “독립 만세”
  • 배재욱
  • 승인 2019.01.27 21: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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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집 목사·김태련 조사 등
종교인 주축으로 거사 계획
1919년 3월 8일 시작 된 운동
학생·장꾼 가세로 달아올라
서문시장 동쪽 3·8만세운동 길
아직도 그날의 함성 들리는 듯
독립선언서 인쇄한 계성학교
만세 탑 세우고 동판 새겨 기념
대구38만세운동길의벽화
3.8만세운동길의 벽화
 
대구38만세운동길-2
대구 3.8 만세 운동길

 

3ㆍ1운동 100주년, 배재욱의 대구경북 역사기행 <1> 대구

겨울 기운이 완연한 날 청라언덕에 올랐다. 100년 전의 함성이 몰려오는 청라언덕 위에는 오늘도 여전히 사람들이 찾아와 그 날 그 함성을 듣고 싶은 듯 벽면에 걸린 사진들을 바라보고 기념사진을 찍는다.

청라언덕은 대구동산을 일컫는 다른 말인데, 담쟁이 넝쿨이 자라는 언덕이란 뜻이다. 박태준 작곡 이은상 작사 ‘동무생각’ 가곡의 배경이다. 박태준은 독실한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나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한 재원이었다. 숭실전문학교에 진학해 음악을 전공하고 대구제일교회 찬양대 지휘자로 활동했다. 박태준이 마산 창신학교에서 교편 잡을 때 이 학교의 설립자 이승규의 자제인 노산 이은상과 교유했다. 박태준은 계성학교 다닐 무렵 자신이 짝사랑한 신명학교 여학생의 이야기를 이은상에게 하게 되고, 이은상은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라는 시를 써주었다.


이렇게 시와 감성과 음악이 있는 청라언덕 길은 100년전 대구의 읍민들의 응어리진 마음을 폭발시키는 통로가 된 언덕길이다. 대구의 몽마르트르 언덕같이 시와 꿈과 예술과 음악이 흐르는 이 언덕이 한때는 폭풍이 휘몰아치고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폭풍의 언덕이었다. 그래서 그 언덕을 오르는 사람들은 숙연하게 민족의 아픔과 해방의 기쁨을 돌아보며 남북이 하나 되어 즐기게 될 통일을 염원하는 것이다.

청라 언덕에서 일어난 폭풍의 서막은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서울의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함으로써 일어난 만세운동이다. 3.1운동은 민족 독립운동의 하나의 신호탄이 되어 전국적으로 그 불길이 옮겨붙었다. 대구에서는 그 불길이 3월 8일에 서문시장에서 일어났다. 대구의 3.1만세 운동의 주동세력은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이만집(李萬集) 목사, 남산교회 김태련 조사와 계성학교 학생들, 신명여학교 학생들, 대구성경학교 학생들, 대구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 학생들, 대구 농림학교(현 대구농업마이스터고) 학생들이었다. 학생들과 주민 · 기독교인 · 천도교인과 장꾼 등이 가세하여 군중의 수는 1천여 명이 되었다.

만세 운동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안 일본 경찰을 방해로 독일 선언서를 낭독할 수 없게 되자 공약 3장만 힘차게 외친 후, 대구 3.1운동의 중심인물이었던 이만집 목사는 “지금이야말로 한국이 독립을 할 수 있는 때다. 각자가 독립을 성취할 수 있도록 만세를 부릅시다.”라고 외쳤다. 이에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있는 힘을 다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것이 대구만세 운동의 첫 순간이었다.

서문시장에서 시작된 만세 운동은 안경수(安敬守, 당시 30·농업)가 태극기를 들고 앞장서서 걷고 그 뒤를 따라 그리스도교인들, 학생들, 장꾼 등 천 여명이 대열을 이루어 만세 운동 행진을 했다.

100년전의 대구는 풍전등화와 같은 암담한 현실 속에서 모두들 낙담할 수밖에 없었지만, 서울에서 들려온 3.1만세운동 소식으로 조국의 독립에 대한 염원으로 대구 읍민들이 단결했고 3.8대구 만세운동은 경상도 전역으로 전파됐다.

그런데 대구 3.1운동의 거사는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계획적이고 조직적이었다는 데서 대구 경북지역의 저력을 느끼게 한다.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으로 인하여 전국적으로 일본 경찰과 헌병의 경계가 삼엄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 서울에서 내려온 33인 중 한 사람인 이갑성(李甲成)이 대구의 남성정교회 이만집 목사, 남산교회 김태련 조사, 계성학교 백남채 선생 등을 만나 서울에서 일어난 3.1 거사를 전하며 대구에서도 궐기하도록 권했다.

서울 소식과 국내외 정세를 들은 대구의 인물들은 상당히 고무되어 이만집과 김태련 등 그리스도교 관계자들과 계성학교 교감 김영서(金永瑞) 등이 협의하여 대구에서도 만세 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정하였다. 이만집은 대구 만세 운동의 책임자였고 김태련은 행동 대원이었다. 8일에 거사할 것을 결정한 후, 김태련은 계성학교에서 가져온 등사기로 3월 7일 밤 자기 집에서 독립선언서 200장을 인쇄하고 태극기도 4본을 준비했다. 계성학교 학생들은 아담스관 지하실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했고, 집에서 태극기를 만들었다. 만약 이렇게만 진행되었다면 대구에서의 만세운동은 기독교계의 일로 그쳤을 것이지만, 공립학교인 대구고등보통학교가 대구 만세 운동에 함께 참여하게 되어 대구 온 읍민의 거사가 되었다. 여기에는 계성학교 교사인 최상원이 당시 자신이 기거하고 있었던 여관 주인의 아들인 대구고보 학생에게 만세운동 참여를 권유한 것이 계기가 됐다.

대구에서의 운동은 이렇게 그리스도교인들과 학생들이 주축을 이루면서 서문시장에 나온 장꾼들이 가세함으로 맹렬하게 달아올랐다. 대구의 만세운동 주동자들은 미리 그런 계획으로 3월 8일 토요일 오후 1시를 만세 운동의 시발점으로 삼았던 것 같다. 서문시장은 영남지역의 중심 시장이었으며 더욱이 토요일 학생들이 귀가하는 시간을 거사시간으로 정했던 것이다. 서문시장 가까이 있었던 신자들과 학생들은 하나 둘 서문시장으로 잠입해 들어 왔지만,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약속시간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아 초조하게 기다렸다. 오후 2시가 되어서야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 200여명이 신명학교 근처에 진 치고 있던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서문시장을 향해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만집과 김태련은 경찰의 위협과 방해가 있었지만, 3.8 만세 운동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대구에서의 만세 운동을 전개하여 독립운동의 기치를 높였다.

이러한 역사를 묵묵히 지켜본 대구 3.8만세운동의 통로였던 대구 동산 길에는 오늘도 많은 인파가 몰려와 그날의 함성을 되새긴다. 서문시장에서 동쪽으로 뻗은 3.8만세 운동길은 서문시장에서 대구 시내 방향으로 난 길이다. 이 길을 중심으로 만세 운동에 함께했던 기관들이 대부분 모여 있다. 동쪽으로 남성정교회(대구제일교회)와 남산교회가 있고 북쪽으로 신명학교가 있고, 서쪽으로 신정교회(현 서문교회)와 계성학교가 있고 그 중앙에 대구성경학교가 있었다.

이만집은 계성학교의 교사로 활동하다가 나중에 신학을 공부한 후 목사가 된 인물로 3.1운동이 일어날 당시에는 이만집이 대구제일교회의 담임목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대구의 3.8만세 운동이 일어날 당시 이만집이 대구 만세 운동의 중심인물이 되었고 대구제일교회와 뿌리를 같이 하는 기관인 남산교회, 계성학교, 신명학교 그리고 성경학교가 그 중심에 함께 참여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현실이다.

이점에서 대구 3.8운동은 다른 지역과 다른 특이한 면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아마도 대구 3.8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대부분 학교들이 미국 선교사들에 의하여 세워졌고 일본 당국에 의하여 세워진 학교들에는 비밀 유지를 위해 3.8거사가 널리 전해지지 않은 것에 기인하리라고 본다. 그러나 계성학교 교사 최상원에 의하여 대구고등보통학교학생들에게 거사가 전달되어 대구 만세 운동이 기독교만의 운동이 아니라, 조직적인 거사가 될 수 있었다.

대구제일교회를 방문한 날은 햇빛이 빛나는 날이었다. 지금 대구제일교회는 옛 대구성경학교가 있던 동산 위로 이전했지만, 옛날에는 지금 대구제일교회 기독교역사관 자리에 있었다. 그날의 함성을 다 알고 있는 듯 예배당 건물은 말없이 오는 사람들을 반긴다.

대구 동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대구남산교회가 위치해 있다. 남산교회는 1914년 12월 30일 대구제일교회로부터 분립된 교회로 대구읍성 남쪽 아미산(峨嵋山) 이라고 불리어지던 언덕바지 땅에 세워진 교회였다.

계성학교는 대구 3.8운동의 중심에 있는 학교로 이 학교 아담스관 지하는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역사적 현장이다. 계성중 장욱 교장선생님이 안내한 아담스관 지하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한 우리 민족에게 너무나 소중한 역사적 현장임에도 방치되어 있다는 느낌이어서 안타까웠다. 계성학교 동문들은 3.8 대구 만세 사건의 역사적인 현장을 지키고자하는 열정으로 만세 탑도 세우고 그 역사적인 현장을 기리고자 동판을 새겨 기념하고 있다. 하지만 정확한 역사적인 고증을 하지 않은 듯한 부분이 있어 아쉬움도 있었다. 신명학교 교내에도 신명고등학교 졸업생들이 세운 3.8만세 운동 기념탑이 있다.

<영남신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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