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은 사과의 사람
썩은 사과의 사람
  • 승인 2019.01.28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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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란 시인

가장 좋은 사과는 내일 먹겠다고
사과 상자 안에서 썩은 사과를 먼저 골라 먹는다
가장 좋은 내일은 오지 않고
어리석게도
날마다 가장 나쁜 사과를 먹는다

가장 나쁜 사과를 먹고 나면 그다음 나쁜 사과가
가장 나쁜 사과가 된다
어리석게도
나쁜 선택은 나쁜 선택을 반복한다

오, 제발 이미 다 나빴으니 더 나쁠 게 없기를

나도 안다
가장 좋은 사과를 먼저 먹기 시작해야 한다
가장 좋은 사과를 먹고 나면
그다음 사과가 가장 좋은 사과가 된다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사과상자에서 가장 좋은 사과를 고르려 할 때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아픈 사과
검은 반점이 뒤덮인 사과
진물 흐르는 사과
다른 사과들에게 역병을 전염시킬 사과,

불임의 사과나무들 뽑혀나가고
일찌감치 사과밭 밖으로 추방당하고도
흰 사과꽃 솎아낼 철이 오면
사과나무 사이를 맨발로 춤추는 꿈을 꾼다

왜 꽃은 이렇게 한꺼번에 많이 오는 것일까
투덜투덜 심지어 불평까지 하면서

가장 좋은 사과부터 먹는 습관을 가진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어쩌다 날아다니는 사과탄에 한쪽 모퉁이가 먹힌
사람이 되었을까 …시집 <장미키스>

◇최정란= 경북 상주 출생, 계명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계명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3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여우장갑’ ‘입술거울’ ‘사슴목발애인’ ‘장미키스’, <요산창작기금> <부산문화재단창작기금> 2016년 제7회 <시산맥작품상> 2017년 세종도서 문학나눔.

<해설> 나쁜 사과를 먼저 골라먹는 일상적 행위에 대한 역발상의 울림이 크다. 언제나 좋은 사과를 먼저 골라먹을 수도 있다니!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코 배제시킨 수많은 ‘나쁜 존재’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간다. ‘잡雜’자를 곁들이기도 한다. 잡초, 잡꽃, 잡일, 잡상인…. 누가 무슨 권한으로 규정한 잡것들이던가? 심지어 사람끼리도 갖가지 기준을 세워 솎아내기를 하고, 눈총도 보내고, 왕따도 시킨다. 역병을 전염시킨다는 합리적 논리야 명쾌하겠지만 자칫 날아다니는 사과탄에 한쪽 모퉁이가 먹히는 부메랑이 될 수도 있겠다. 문득 뒤통수를 땅! 때리는 시인의 역습이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서태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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