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인가 대립인가
갈등인가 대립인가
  • 승인 2019.02.12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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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청
부국장
첩첩산골에서 초·중·고를 함께 다니다가 뿔뿔이 객지로 흩어졌던 두 친구가 30여 년 만에 대구에서 우연히 만났다. 워낙 고향에서 친하게 자란 터라 그날 이후 둘은 매주 만나며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로 다시 자리매김 했다. 그 후배들과 자주 저녁 모임을 갖기에 둘 사이의 우정은 누구보다도 잘안다. 내 고향 후배 둘의 이야기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둘 사이에 사달이 났다. 두어 달 쯤 전이었을까? 저녁 모임에 이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 날따라 조금 일찍 온 후배 둘이서 말다툼을 한 뒤 서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고 한다. 둘은 정치적 성향이 달랐다. 한 명은 지난 대선에서 보수 후보에게 투표했고, 또 다른 한 명은 진보 후보를 찍었다.

그날 다툰 이유는 바로 5.18이었다. 한 명은 지만원 박사의 5.18사건 재조명 인식을 가슴 깊이 공감하고 있었고, 다른 후배는 광주의 그 날 민주화 운동에 대해 열렬한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그날 저녁 모임은 시작도 못하고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그 날 이후로 우리 모임에서는 정치나 사상에 대한 얘기는 조심스러워졌고 가능한 서로 말을 아끼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공교롭게도 요즘 온 나라가 5.18 문제로 요동을 친다.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에 비유되는 이 문제는 자유한국당 일부 의원들이 극우논객인 지만원씨를 초청, 간담회를 열면서 촉발됐다.

‘5·18민주화운동을 모독했다’는 파문이 증폭하면서 민주당과 야3당은 국회 윤리위에 한국당 3인방을 제소하는 등 해당 의원 징계 공조를 본격화 했다. 한국당의 김병준 위원장은 “광주시민에게 죄송하다”며 사태수습에 진땀을 빼는 모양새다. 한국당 중진인 김무성 의원은 입장문에서 “역사적 평가가 끝난 5·18을 부정하는 것은 의견 표출이 아니라 역사 왜곡이자 금도를 넘어선 것”이라면서 “북한군 침투설을 계속 제기하는 것은 이땅의 민주화 세력과 보수·애국 세력을 조롱거리로 만드는 일”이라고까지 했다.

모독 발언 당사자이면서 논란이 된 공청회를 주최한 김진태 의원은 지난 11일 제주도당 간담회에서 “행사 참가자들도 5·18 유족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려는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라며 진화에 나섰다. 이어 12일 김 의원이 광주 북구 중흥동 한국당 광주·전남 시·도당사에서 진행하려 했던 지역당원 간담회는 5·18 유공자 등의 ‘망언 공청회’ 항의로 예정된 일정을 채우지 못하고 10분 만에 마무리되고 말았다. 김 의원은 그러나 “5·18 진상규명 특별법에 북한군 개입 여부의 진상을 규명하게 돼 있다”며 “5·18 유공자 명단이 공개가 안 돼서 이런저런 의구심을 키우고 있다”고 말해 추가 논란의 불씨를 남겼다. 이에대해 광주·전남 단체장들은 지난 10일 잇따라 이를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5월단체들은 천막농성과 함께 지만원씨에 대한 법적대응에 들어갔다.

급기야 청와대도 한 몫 거들고 나섰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1일 국회에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 가운데 권태오 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처장, 이동욱 전 월간조선 기자의 재추천을 요구키로 한 것이다. 이유는 ‘두 사람의 경우 법에 규정된 자격요건을 충족하지 못했기에 후보 재추천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를두고 미국을 방문 중이던 나경원 원내대표는 워싱턴에서 “청와대 판단은 사실 정치적 판단으로 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자격요건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며 유감을 표현했다. 그러면서 “문 대통령이 어떤 문의나 통보 없이 일방적으로 이들을 거부한 것은 한국당과 국회를 무시하는 것은 물론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정면도전”이라고 비판했다.

배가 산으로 가고 있다.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상이 제대로 규명돼야 한다. 물론 5.18유공자 명단도 공개가 맞다면 공개돼야 한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보수와 진보의 갈등을 넘어서고 있다. 대립 국면인 것이다. ‘갈등’은 조정의 기회라도 있지만 ‘대립’은 공멸로 향하게 마련이다. 무엇이 정답인지는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역사가 증명해 줄 터이지만 5.18이 정치의 샅바 싸움에서 우위를 점해 보려는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강력한 무기로 작용해서는 안 될 듯하다.

두 친구를 지켜보면서 모임에 함께 참석하던 한 사람은 “이데올로기는 애비와 자식 사이도 갈라놓는다고 하더니만…”이라고 혀를 찼다. 지금 우리 사회를 흉흉하게 갈라놓고 있는 5.18 논란이 그저 갈등이기를 바란다. 중재도 화해도, 조정도 할 수 없는 대립이 아니기만 바란다. 대한민국 전체가 이데올로기 싸움에 갇혀 공멸의 길로 치닫지는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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