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립보행
직립보행
  • 승인 2019.02.12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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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가 하얗게 드러난 무릎이 흉터로 뒤덮인 후에

직립을 더듬는다

땅만 잘 디디는 것이 아니라 허공을 더 잘 디뎌야 한다

제대로 걷기 위해서는,

두 발이 땅을 디딜 때 두 팔이 번갈아 허공을 디뎌야 한다

땅바닥이 견고하게 받쳐주어도 엎어지고 자빠지는 것은

두 팔이 제 몫을 다하지 않기 때문

허공을 딛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두 손이

엉뚱한 데 골몰하기 때문

지상의 금화를 움켜쥔 손으로 날아가는 나비를 잡으려다가

허공의 검은 돌부리에 걸리기 때문

허공의 숨은 함정에 빠지기 때문

사람이 허공을 딛고 걸을 줄 알고부터

직립보행을 하게 되었으나

직립보행을 하고부터

허공을 잘 디뎌야 한다는 사실은 곧 잊혀졌지

제발, 걷기에 집중 좀 해줘!

산만한 손은 발의 간절한 애원을 걸핏하면 잊고

멍과 흉터와 골절은 다리의 몫이 되지

빈손으로 휘적휘적 허공의 풀밭을 휘젓고

빈주먹으로 허공의 돌다리를 두드린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 아니

쓰러지기 위해서, 다시 쓰러지기 위해서,

더 잘 쓰러지기 위해서*

한 걸음씩 허공을 짚는다

빈 손바닥으로 허공의 길을 더듬는다

바람에 지워진 허공의 손자국 위에 심장을 내려놓고

더듬더듬, 한 치 앞도 모르는 직립의 나날들



* 모리스 블랑쇼 “Fail, Fail again. Fail better”에서 Fail을 Fall로 바꾸어본다. “To fall. To fall again. To fall better” …시집 <장미키스>



◇최정란= 경북상주 출생, 계명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계명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3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여우장갑』 『입술거울』 『사슴목발애인』 『장미키스』,<요산창작기금> <부산문화재단창작기금> 2016년 제7회 <시산맥작품상> 2017년 세종도서 문학나눔.



<해설> 시인의 눈은 참으로 놀랍다. 무릎관절 고장으로 땅바닥을 기어 다니다 얻은 경험에서 이런 교훈을 깨닫다니! 직립보행에서 허공을 딛는 두 팔의 신체공학적 운동을 읽어내었다.

통쾌한 일침이다. 금화를 움켜쥔 손으로 나비를 잡으려다 허공의 검은 돌부리에 걸리는 인간들에 대한 경고에 웃음을 머금다가도 이내 숙연함에 젖어든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직립의 나날들을 위해 빈 손바닥으로 허공의 길을 균형 맞게 더듬어 걸어야 한다. 자칫 욕심으로 어긋나면 그 멍과 흉터와 골절은 다리의 몫이 된단다. 사람 다니는 길이라고 다 길이 아니지 않은가. 두 다리가 걷는 길을 위해 빈 손으로 허공을 잘 더듬어 가야 하겠다. -서태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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