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도 몰랐던 삶, ‘詩같은 삶’이 되다…영화 '시인 할매'와 '칠곡 가시나들'
ㄱ도 몰랐던 삶, ‘詩같은 삶’이 되다…영화 '시인 할매'와 '칠곡 가시나들'
  • 배수경
  • 승인 2019.02.14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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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할매
자식 숙제 못 봐준 때 있었지만
이젠 일상 그리는 솜씨가 제법
칠곡 가시나들
공부하고 도전하는 삶이 청춘
간판 읽는 기쁨에 덩실덩실 춤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던 할매들이 한글을 배우고 시인이 되었다. 이보다 더 영화같은 일이 있을까. 다큐멘터리 영화 ‘시인 할매’와 ‘칠곡 가시나들’을 보기 전까지는 할머니와 시인, 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는 생각을 했다. 인생 팔십줄에 한글과 사랑에 빠진 할머니들의 설렘 가득한 이야기를 담은 두 편의 영화는 ‘웰 에이징’(well-aging)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시인할매
영화 '시인 할매'

지난 5일 개봉한 ‘시인 할매’(감독 이종은)는 전남 곡성군 서봉마을 할머니들이 주인공이다.

한글을 몰라 도서관의 책을 거꾸로 꽂던 할머니들은 어느새 ‘시집살이 詩집살이’(2016),‘눈이 사뿐 사뿐 내리네’(2017) 등 두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 되었다. 영화는 시집을 낸 후 할머니들의 일상을 잔잔하게 그리고 있다. 비가 오는 날에는 부침개를 부쳐 나눠먹고, 여름날에는 정자에 모여 봉숭아 물을 들인다. 섬진강을 바라보며 시도 쓴다. 초등학교에서 작가와의 만남도 가졌다. 그럴싸한 시작노트 하나 없지만 달력이나 전단지 뒷면에 삐뚤빼뚤 서툰 글씨로 쓰여진 할머니들의 시는 큰 울림을 준다.

한글을 몰라 아들 숙제도 못 봐줬던 아픔, 군대 간 남편에게 편지 한 통 못 보냈던 아쉬움, 먼저 간 아들과 남편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도 시가 된다. 시를 통해 드러난 할머니들의 속내는 심순덕 시인의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라는 시를 떠오르게 한다. ‘하루 종일 밭에서 힘들게 일해도, 찬 밥 한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던 자식들에게 엄마도 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다는 걸 알게 해준다.

영화 속 할머니는 ‘벌로 살았다’고 하지만 우린 안다. 그녀들이 ‘벌로’(건성으로, 대충대충) 살아오지 않고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왔음을. 영화 속 아름다운 곡성의 사계는 덤이다.

칠곡가시나들
영화 '칠곡 가시나들'

27일 개봉을 앞두고 있는 ‘칠곡 가시나들’ 역시 할머니 시인이 주인공이다. 평균나이 86세, 경북 칠곡군 복성리 할머니들의 시는 ‘시가 뭐꼬’(2015), ‘콩이나 쪼매 심고 놀지머’(2016) 두 권의 시집으로 묶여 세상으로 나왔다.

‘칠곡 가시나들’은 그동안 ‘트루맛쇼’, ‘MB의 추억’등 대한민국의 문제점을 파헤치는 다큐로 익숙한 김재한 감독이 ‘웰컴 투 에이징’을 주제로 선보이는 휴먼 다큐이다. 재미있게 나이듦을 표현하고자 했던 감독의 의도대로 ‘칠곡 가시나들’은 유쾌 발랄하다. 80넘어 한글을 배우려니 돌아서면 잊어버리지만 ‘글자를 아니까 사는게 더 재미지’고, ‘가마이 보니까 시가 천지삐까리’라며 설렘 가득한 나날을 보낸다. 나란히 서서 간판을 읽고 좁은 골목길을 돌아 덩실 덩실 춤을 추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보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영화 속 할머니들의 삶은 외롭고 쓸쓸한 노년이 아니다. 오히려 하루하루 설렘의 연속이다. 한글을 배우는데 끝내지 않고 그동안 맘 속에 품었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새로운 도전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이라고 했던가. 그런 의미에서 할머니들은 여전히 청춘이다.

‘시인 할매’와 ‘칠곡 가시나들’, 두 영화 모두 배우지 못하고 고생만 했던 할머니들의 ‘한’에 포커스를 맞추지 않는다. 70,80이 되어도 뭔가를 시작하기에 늦지 않은 나이라는 걸 보여준다. 할머니 시인의 탄생에는 곡성 길작은 도서관 김선자 관장과 칠곡 복성2리 배움학교 주석희 선생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때론 엄하고 때로는 살갑게 할머니들을 배움으로 이끈 그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우리는 할머니 시인을 만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영화 속에는 할머니들의 시가 자주 등장한다. 할머니들이 지은 시는 맞춤법도 틀리고 서툴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 속에는 평생을 참고 살고, 일만 하고 살았던 우리네 엄마들의 지나온 삶이 오롯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매일 매일 읽고 쓰는기 와 이리 재민노”라고 이야기하는 경상도 할매와 내리는 눈을 보며 “잘 살았다. 잘 견뎠다. 사박사박” 이라는 말을 건네는 전라도 할매들의 이야기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잔잔하면서도 큰 감동을 전해준다.

영화관은 젊은이들이나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부모님들과 함께 관람해도 좋겠다. 영화를 보고 나면 부모님과 나눌 이야기가 많아질지도 모른다.

배수경기자 micbae@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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