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어보자, 삶에게
물어보자, 삶에게
  • 승인 2019.02.17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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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윤 시인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이다. 언어와 성폭력이 사회 전반적으로 팽배한 지는 이미 오래다. 침묵의 세월이 길었던 탓에 최근 불거졌을 뿐이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에게 반말은 예사고, 파지수레를 밀고 앞서가는 노인에게 경적을 울리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설사 놀라서 쓰러진다해도 유유히 지나가는 차량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렇듯 사회적 약자의 불이익은 사회 관심 밖의 일들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우리에게는 예사로운 일이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러니까, 노후에 고생하지 않으려면 열심히 살아야 해’라고 다짐하는 정도였다. 스포츠 일각에선 선두권을 다투는 비등비등한 선수들에게 선발 특혜를 준다는 미명하에 우롱되어왔던 인권도 ‘메달획득’을 위해서라면 국가는 기꺼이 눈을 감아주었다. 관련부처에서도 ‘모르쇠’로 일관된 입장표명도 당연시 여기던 시절을 우리는 견뎌왔다. 다만 ‘이 지경까지인줄은 몰랐다’는 고위직 공무원들의 태도가 야속하기만 했던 시절이었다. 이는 어느 정도 그럴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심각한 줄은 몰랐다는 의미와 상통한다. 툭하면 ‘담당자의 실책’이고, 툭하면 ‘국민들에게 송구스럽다’는 판에 박힌 사과 성명 발표가 일상이었다. 십여 년 전, 용산철거민 점거농성 당시에 강제진압과정에서 4명의 철거민과 17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적이 있었다. 그들의 목숨의 가치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참사’로 기록된 것이 전부였다. 강자가 약자에게, 약자가 약자에게, 국가가 국민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물론이고, 가정과 교내에서 일어나는 폭력조차 ‘대의명분’이 단조롭던 시절을 살아왔다. 이제라도 사필귀정(事必歸正)과 권선징악(勸善懲惡)이 기지개를 켜는 듯해서 다행한 일이다. 한 마디로 새로운 사건이 아니라 여태 있어왔던 사건들이 이제야 ‘사건’취급을 받을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란 소리다.

사나운 것과 용맹한 것은 의미가 다르다. 대상을 가리지 않고 폭력과 폭언을 일삼는 것은 사나운 것일 뿐 용맹과는 거리가 멀다. 얼마나 정의로운가 하는 것이 이들을 구분하는 잣대가 될 수 있겠다. 가장 위험한 것은 맹목적인 사나움이다. ‘묻지마 살인’은 장소와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가해자와 동등한 장소와 시간에 머물렀다는 것이 범죄동기일 뿐이다.

지난해 10월에 만취한 20대 박 모 씨가 길에서 폐지를 줍던 58세 여성을 무차별 폭행한 사건이 발생했다. 끝내 피해자는 숨지고 만 안타까운 사연이었다. CCTV 영상 속에 비친 당시 상황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사람을 무차별 구타하는 장면은 ‘원한관계’를 추정해볼 수 있을 만큼 잔혹했다. 수사가 진행되면서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원한’은 고사하고 심지어 전혀 서로가 모르는 타인이었다. 이런 허망한 죽음이 또 어디에 있을까. 그날 그 자리에서 이십대 젊은이의 눈에 어머니뻘의 그녀는 어떻게 비친 것일까. 그보다 그는 평소에 어떤 사람이었을까. 검찰은 당시 박 씨가 범행 전 ‘사람이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등을 검색한 점을 고려해 살인 혐의를 적용해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그러나 창원지법 통영지원은 박 씨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해자를 잔인하게 폭행해 숨지게 했지만 형사재판을 받은 전력이 없는 초범”인 점과 “어린 나이에 한 가정의 가장 역할을 하고 있고 반성하는 모습까지 고려했다”라며 양형 이유를 밝혔다고 한다. 그의 검색어를 보면 살인의도와 잠재적인 범죄의식이 충분히 엿보인다. 폭력 또는 살인 대상을 물색하고 다닌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가는 부분임에도 재범위험성 평가 결과 ‘추가 살인 가능성에 개연성이 없다’는 이유로 전자발찌 부착 청구도 기각되었다. 그를 엄벌에 처해달라는 국민청원이 41만 명을 넘어섰는데, 법은 초범인 그에게 갱생의 기회를 주었다. 너무 비약한 예겠지만, 히틀러도 유대인학살 초범이었고, 이완용도 매국 초범이었다. 초범도 초범 나름이다. 사형제도는 필자도 반대하지만, 사회와의 영구격리만큼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법은 죄에 대한 구형보다 유사한 범죄를 방지하는데 기여하여, 평화로운 질서를 유지하는데 그 목적을 두어야 한다. 사람이 사람에게 해악을 끼칠 때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때로는 수많은 물음표를 찍으며 탐구하고, 때로는 느낌표로 감동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쉼표를 찍어 쉬어가기도 하며, 말줄임표로 침묵할 줄도 알아야 하며, 때로는 따옴표로 할 말을 하는 용기도 필요하고, 마침내 마침표로 삶을 맺어가는 과정이다. 그 누구도 함부로 타인의 삶에 마침표를 찍을 권리는 없다. 게다가 가해자가 누구인지, 영문도 모른 채 청천벽력의 변고를 당한 고인과 유가족들의 가슴에 남은 한(恨)은 또 어찌할 것인가. 법은 형평성과 판례를 따르는 원칙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급변하는 ‘삶의 가치’에 대한 국민들의 공감임을 잊어선 안 된다. 평화는 구성원들의 암묵적인 동의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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