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기를 맞이하는 ‘3·1혁명’의 뜻은
1세기를 맞이하는 ‘3·1혁명’의 뜻은
  • 승인 2019.02.18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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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열 전북대 초빙교수
일제의 강점에 대항하여 전 국민이 떨쳐 일어났던 3·1혁명의 정신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만 같다. 경찰국가 또는 헌병국가의 별칭을 가졌던 일본은 총독부를 통하여 조선민족을 가장 모질게 다뤘다. 세계를 둘러보면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시대에 대부분의 약소국들이 강대국의 먹이가 되었다. 해가지지 않는다는 나라 영국은 자기네 나라보다 면적으로나 인구수로나 비할 데 없이 큰 인도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그들 역시 인도인들을 개돼지처럼 취급한 것은 일본이 조선민족을 조센징으로 하칭하며 다룬 방식과 별차가 없었으나 내선일체를 내세우고 창씨개명을 감행하며 조선글과 조선말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 탄압의 역사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만행이었다. 일제의 강점에 대항하여 조선민족은 온 몸을 던져 맞섰다. 개중에는 이완용 등 을사오적을 비롯한 매국노들도 없지 않았지만 민영환 등 수많은 지도급 인사들이 과감하게 자결로 기개를 보였다. 책임이 막중한 사대부 중에서는 사재를 털어 의병대를 조직하고 일제경찰과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하거나 붙들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조선총독부 재판소에서는 의병투쟁을 하거나 독립운동을 했던 애국지사들에게 치안유지법이라는 괴물법률로 살인강도 방화 등의 중대 형사범을 만들어 수괴급은 무조건 교수형으로 처형했다.

1910년 강제합방 후 일제는 가장 악랄한 방법으로 조선민족의 투지를 꺾는데 주력했다.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여 행여 있을 반발을 뿌리부터 솎아냈다. 동학혁명의 본고장이었던 전라도는 잔재를 말살시킨다는 핑계로 혹독한 탄압의 대상이었다. 일본 해적이 제일 목표로 삼았던 경상도는 일본과의 지리적인 가까움으로 집중적인 수탈지역이 되었으며 양반고을 충청도는 전통이 살아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하여 모질게 억압했다.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기독교가 번성한 평안도는 일제 총독부에게는 눈엣가시였다. 기질이 억센 함경도는 중국대륙과 연결되어 있는 위험지대로 최대 감시지역이 되었다. 안중근의사 등을 배출한 황해도 역시 일제가 두려워하는 지역의 하나였다. 경기도와 강원도는 서울을 둘러싼 지역으로 일제 경찰과 헌병들이 집중 배치되어 조그마한 움직임도 현미경처럼 찾아냈다. 이런 압제를 뚫고 일어난 것이 1919년 3·1만세운동이다. 민족대표 33인이 서울에 모여 장중한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것이다. 일제의 허를 찌른 담대하고 기개 넘치는 선언이었다. 천도교 손병희는 민족대표 중심에 서서 자금과 조직을 관장했으며 모두 잡혀가 재판을 받을 때에도 민족의 기개를 만방에 과시하였다. 역사학연구소에서 펴낸 ‘함께 보는 한국 근현대사’의 기록에 의하면 3·1만세운동에 참여한 인원을 200만이라고 한다. 조선총독부는 106만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전국적인 만세시위건수는 1천542회, 사망자 7천509명, 부상자 1만5천961명, 체포자 4만6천948명이라는 발표는 총독부 발표와 똑같다. 이것은 경찰력을 동원하여 모든 정보를 수집한 총독부가 축소 지향적으로 대외 발표를 한 것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보이며 일제가 은폐한 더 많은 사망자 부상자 구속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것이 억지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만세시위 참여자의 숫자는 광화문에서 벌어졌던 월드컵 당시의 응원군중이나 촛불시위 때의 군중 숫자가 터무니없이 부풀려지거나 축소되었던 쌍방의 견해차이가 있었음을 감안할 때 106만이나 200만이나 별로 문제 삼을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다만 공식 발표된 사망자가 7천509명이라는 숫자는 4·19혁명 186명, 5·18민주화운동 165명에 비해서 너무나 엄청난 수다. 4·19보다 40배의 희생자를 낸 3·1만세운동을 3·1혁명으로 격상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이처럼 단순한 통계숫자만으로도 그 타당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3·1혁명이 있기 직전 적도(敵都) 동경유학생 600여 명이 동경 YMCA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으며 그보다 1주일 앞서 2월1일 만주와 러시아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39인의 독립열사들이 “육탄 혈전으로 독립을 완성해야 한다.”고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한 것은 3·1혁명의 기폭제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필자는 연전에 범사련과 함께 동경 YMCA를 방문하고 강당에서 2·8독립선언에 대한 견해를 나름대로 강연할 기회가 있었다. 그 어려웠던 시절 동경유학생은 국내에서도 가장 부러워하는 신분이었음에도 과감히 떨쳐버리고 감옥을 두려워하지 않던 백관수 김도연 등 대표학생의 용기는 우리 민족이 살아 있음을 과시한 쾌거였다. 지금 동경 YMCA에서 자료실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사람은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 다즈케 가즈히사다. 그는 1986년 동경외대 한국어학과에 입학한 후 한국의 전통문화와 역사에 심취하여 사물놀이를 배우고 한국어 봉사자가 되었다가 “역사를 배우고 기억하는 게 한·일 소통의 열쇠”라고 확신하여 조선의 독립선언을 일본인들에게 알리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1세기를 맞이한 3·1혁명의 큰 뜻은 지금처럼 꽉 막혀있는 한국과 일본의 물꼬를 트는 것이라는 생각을 새삼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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