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금치를 다듬으며
시금치를 다듬으며
  • 승인 2019.02.19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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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봉조 수필가
또 시금치를 샀느냐고 친구가 물었다. 그리고 서로 마주보며 깔깔 웃었다.

요즘 시장에 나가보면 시금치가 지천이다. 쩍쩍 벌어지고 투박하여 한데 묶을 수도 없는 노지(露地) 시금치가 더욱 눈길을 끈다. 잎이 울긋불긋한 것은 가을에 파종한 시금치가 추운 겨울을 나면서 얼었다 녹기를 거듭하며 단맛을 얻게 된 것이라니, 친근감까지 드는 것이 사실이다.

며칠 전 시장에서 단골아주머니에게 천 원짜리 지폐 두 장을 주고 산 시금치가 양이 얼마나 많은지. 살짝 데쳐서 일부는 초고추장에 무치고, 나머지는 참기름과 맛소금에 살살 버무려 절반은 김밥과 잡채에 넣고, 남은 것은 천천히 먹으려고 냉동실에 보관했다.

시금치는 비타민 A와 C는 물론 칼슘, 철분, 엽산, 식이섬유 등 영양가가 매우 풍부해 근육을 튼튼하게 하고, 눈과 혈관 건강에 좋으며, 빈혈과 변비 예방에도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소화기능 강화와 체중감량에도 효과가 있다는데, 더욱 가까이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싸고, 맛있고, 영양이 풍부한 시금치는 요리를 하기도 쉽다. 부글부글 된장을 끓이다 채 썬 무와 함께 국을 끓여도 좋고, 여러 가지 양념을 이용해 무쳐도 그만이다. 떡국이나 라면을 끓이는데도 한 줌 넣으면 의외로 깊고 달착지근한 별미를 맛볼 수 있다.

그렇게 정감 있는 시금치를 다듬으며 군침이 고이려는데, 며칠 전에 만난 할머니 말씀이 계속 귓전을 맴돈다.

시장 입구의 분식집에서였다. 외출에서 돌아오던 길에 몸이 으슬으슬 춥고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던 탓이다. 동그랗게 입술을 모아 뜨거운 칼국수를 후후 불어가며 만족스럽게 먹고 있을 때, 조용히 팥죽을 드시던 할머니가 침묵을 깨는 말을 걸어온 것이었다.

“칼국수 맛있어요?”

“예. 몸살이 올 것 같았는데, 멸치국물 맛에 속이 후련해집니다.”

“그래요? 맛있을 때 많이 잡숴요. 나처럼 늙어 입맛이 떨어지면, 아무 것도 먹을 게 없어.”

“팥죽도 맛있어 보이는데요.”

“아니, 마지못해 먹고 있는 거야.”

하물며 ‘입맛이 없어지니, 사는 재미도 없어졌다’고 하시며, 몇 번이나 ‘입맛이 있을 때 많이 먹어라’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참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것이 먹는 일인 것 같다. 못 먹어도 걱정이고, 많이 먹어도 탈이 난다. 흔히 별 이유 없이 때가 되니 먹는 것이라고 생각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먹지 못하게 된 사람들에게는 잘 먹을 수 있는 것만큼 부러운 것이 없을 지경이라고 한다.

식도락(食道樂)이라고 했던가. 시간이 날 때마다 맛집을 찾아다닌다는 사람들도 있다. 먹는 것이 유쾌한 취미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 잘 먹는다는 것은 건강하다는 뜻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겠다. 소화흡수가 잘 되면, 순환이 원활하여 몸이 가벼워지고 절로 웃음도 나오기 마련이다.

잘 먹는 것은 보기에도 좋다. 오죽하면, 먹는 모습만으로도 복이 굴러들어온다거나 나간다는 말을 할까. 그러나 심한 편식이나 폭식, 불규칙한 식사 또는 병적으로 먹는 것을 탐하는 경우에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소화불량과 영양 불균형, 비만 등으로 정체가 되어 동맥경화나 심장질환, 우울증 등 여러 종류의 성인병에 노출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먹는 것이 남는 것’이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 말 또한 적당한 섭취와 운동이 균형을 이룰 때 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그 할머니의 말씀처럼 입맛을 잃으면 살아가는 재미까지 없어질 정도라니, 입맛이 살아있다는 것을 감사하게 여겨야할 일이다. 그리고 과식을 걱정하기보다 즐거운 기분으로 먹고, 더 즐거운 기분으로 운동을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출출하고 허전할 때, 갓 지어낸 고슬고슬한 밥과 김이 무럭무럭 나는 구수한 시금치된장국 한 숟갈 입에 넣을 수 있다면 더 이상 무엇이 부러우랴. 자꾸 먹을 궁리를 하다 보니 허리와 뱃살에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어, 다시 운동을 하러 나가야겠다.

겨울이 다 지날 즈음, 추위를 견디는 능력이 강하다는 시금치를 다듬으며 이렇게 많은 생각을 펼치게 되다니. 무심코 먹는 채소도 알고 보면 더욱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다가오는 봄에는 또 어떤 채소들이 마음을 즐겁고 풍요롭게 해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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