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250명 전국 최다 배출 ‘항일운동의 성지’
독립유공자 250명 전국 최다 배출 ‘항일운동의 성지’
  • 배재욱
  • 승인 2019.02.24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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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 안동에 나타난 선교사
기독교 복음 빠른 속도로 전파
당시 지도층들도 받아들여
계획단계서 경찰에 발각됐지만
13일 이상동 단독 시위 강행
지역 사회 움직이는 기폭제로
독립 위해 힘 쏟은 기독교인들
경찰에 붙잡혀 혹독한 고문
안동 지역민들 깊은 감동 받아
계명학교
1911년 설립된 계명학교. 아래 기와 집이 계명학교이고 위의 서양식 건물은 선교사 사택이다.
 

3 ㆍ1운동 100주년 배재욱의 대구경북 역사기행 <4> 안동

영남지역은 예로부터 학문을 숭상하고 예를 존중하는 지역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런 전통의 밑바탕에 경북 안동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으리라고 생각한다. 조선 말엽 세도 정치의 주류가 안동 김씨였기에 안동이란 이름은 어쩐지 고루하고 케케묵은 느낌을 주기 쉽다. 그런데 안동은 좋은 전통을 답습하면서도 새로운 문화의 유입에 벽을 쌓고 배척하지 않고 사리를 바르게 판단하여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전통문화와 함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주역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그런 발상의 전환으로 안동시는 예천군과 함께 도청을 유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경상북도에는 안동 이외에 도청을 유치할 명분과 능력을 가진 시군이 많았다. 경상도란 이름의 근간을 제공하는 경주와 상주가 있고 경제적으로 크게 발전한 구미와 포항 그리고 신흥 공업도시로 도약하는 경산과 영천이 있다. 그리고 경상북도의 중앙에 위치한 의성과 군위가 있고 역사적인 고도인 고령과 성주도 있다. 각 시군은 나름으로 도청 소재지를 유치할 만한 당위성과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안동과 예천이 주도한 계획에 모든 시군은 고배를 마셨다. 이것은 이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안동의 사고가 고루하지는 않다는 반증이 될 것이다.

안동은 예부터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불렸다. 그 만큼 안동 사람들은 학문을 숭상하고 예를 지켰다는 것이다. 그런데 1893년 5월에 안동 땅에 나타난 이방인이었던 배위량(裵緯良, W. M. Baird, 1862~1931)이 던져준 파도는 컸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시는 구한말의 어수선한 시대였고 국운이 기울어지는 상황에서 학문을 숭상하던 안동 땅에 나타난 이방인 배위량을 통하여 안동 사람들은 새로운 학문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을 가졌을 것이다. 배위량이 1893년 5월 5일에 안동에서 쓴 일기에 보면 그는 안동에서 많은 책을 판매했다. 그 책들이 안동 땅에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을 개연성은 자명하다.

 
안동교회
1914년 2월에 준공된 안동교회.



안동에서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했던 양반층지도자들은 국운이 쇠해 가던 그 시절에 서양인 배위량의 등장에 많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고, 그들은 학문하는 사람들답게 책 속에서 길을 찾고자 했다. 그래서 배위량은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서적을 팔 수 있었다.

배위량의 뒤를 이어 안동을 찾은 안의와(安義窩, James Edward Adams, 1867~1929)가 안동을 찾았을 때 이미 그곳에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그것은 안동을 거처 간 서양인 선교사의 흔적을 상정해야 할 것을 말한다. 이렇게 시작된 안동의 기독교는 3.1운동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이러한 일은 안동의 독특한 문화를 이해할 때라야 비로소 이해가 가능하다.

‘안동의 종교. 기독교 편’에 보면 “한국의 경북 안동 지역은 매우 독특한 기독교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안동은 옛날도 양반 도시이고 지금도 양반도시이다. 선비 정신과 유림 문화의 뿌리가 깊은 이 지역에 약 100여년전 기독교 복음이 전파 되었을 때, 기독교가 배척당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정반대의 빠른 속도로 선교가 진행되었다. 이뿐 아니라 그 당시 안동의 정신적 지주이면서 지도층인 유림 선비들이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안동의 유림과 기독교의 밀접한 관계를 말한다.


 
김병우장로
김병우 장로(왼쪽)와 이원영 목사. 안동교회 최초의 교인 김병우 장로는 안동 3.1 운동을 주도한 독립 운동가이고 퇴계의 14세손인 이원영 목사는 예안지역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원영목사
 

 

 

 

 


 

 

“선비 정신과 유림 문화의 뿌리가 깊은” 안동 지역에 기독교 복음이 전해 졌을 때 많은 사람이 호응하고 받아들인 중요한 이유는 안동의 양반과 지식층이 기독교로 개종한데 따른 영향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안동에서 형성된 기독교 문화는 독특하다.

“안동의 3.1운동은 동경 유학생 강대극의 귀국과 함께 세브란스 재학생인 김재명이 서울의 독립운동 소식을 전함으로 단서가 마련되었다. (그리고) 안동교회 지도자들과 고종 인산에 참여한 유림들에 의해 시위운동으로 진전되었다. 시위는 계획단계에서 주동세력들이 일제 경찰에 탐지되어 예비검속 당함에 따라 좌절되는 듯하였으나 13일 이상동의 단독 만세 시위는 은밀히 시위를 추진하고 있던 유림 및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큰 기폭제가 되었다.”

그런데 안동에서의 3.1 운동도 다른 영남 지역에서처럼 기독교 역사 이해 속에서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 전개가 아주 독특하기 때문이다. 안동지역의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의 조직을 통하여 만세 운동을 전개하면서도 자신들만 3.1 운동을 계획하지 않고 안동 지역에 뿌리가 깊은 유림과 함께 협력하여 만세시위를 일으겼다. 즉 안동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지역 사회와 함께 손발을 맞추어 3.1운동을 일으키고 진행했다.

안동에서의 3.1만세 운동의 깃발을 처음 든 사람들은 안동교회와 관련된다. ‘안동의 종교. 기독교 편’은 안동의 3.1만세운동은 당시 세브란스전문학교에서 다니던 의학도 “김재명과 안동교회 담임인 김영옥 목사와 김병우, 이중희 장로등의 비밀모의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3월 12일에 만세 운동을 열기로 했던 계획은 수상한 기미를 눈치 챈 일본경찰에 의해 발각되어 안동의 3.1 운동이 주춤했지만 안동 장날인 3월 17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준비했다. 만세 운동을 위하여 안동교회 여자 신도들인 김정숙, 김병규, 이권애는 “안동교회에서 1911년부터 개교한 계명학교 여학생 30여명을 동원하여 선교사 임시주택으로 사용하던 가옥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하여 시민들이 만세운동에 사용할 수 있었다. 이 날의 만세 운동으로 안동교회 교인 7명은 옥고를 치렀다.” 이러한 이유로 ‘안동의 종교. 기독교 편’은 “안동의 3.1만세 운동은 안동교회 교인들이 주축이 되어 시작했던 것이다.”고 말한다.

3월 17일 안동 장날 열린 3.1만세 운동은 조용하고 점잖은 안동 사람들을 움직이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날 1천500명 이상 군중이 참여하여 만세를 불렀다. 이 영향으로 만세 운동은 안동 전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안동교회 최초의 교인이요 경안지역 최초의 장로인 김병우는 “안동 3.1 운동을 주도한 독립 운동가”였고 안동교회 면려청년회를 창립한 교회의 지도자였다. “김병우는 1919년도 안동 3.1만세 운동에 두 번의 시위에 참여”한 인물로 “3월 18일 안동 1차 시위, 3월 23일 2차 시위에 참여하여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안동에서 일어난 3.1만세 운동이 계기가 되어 기독교인이 된 사람도 있다. 대표적인 사람은이 이원영이다. 그는 퇴계 14세손 유림으로 안동 예안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복역하는 동안 그는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나중에는 목사가 되어 안동을 중심으로 많은 일을 했다. 이원영은 3.1운동에 가담한 독립 유공자 일뿐만 아니라,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하여 끝까지 신앙을 지키고자 신사 참배를 거부한 일로 일본으로부터 박해를 받으면서 절개를 지킨 애국자이고 참 신앙인이기도 하다.

1919년 3.1만세 운동을 통하여 많은 안동 사람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많은 기독교인들은 한국 독립을 위해 힘을 쏟았다. 기독교인들이 고문을 당하며 매우 혹독한 댓가를 치르는 모습을 보고 안동 사람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 안동 기독교 신자들이 희생이 매개가 되어 교회와 지역 사회 사이에 신뢰 관계가 성립되어 돈독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안동은 한국에서 독립유공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지역이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인물인 석주 이상룡(1858~1932)이다. 안동에 있는 그의 생가 ‘임청각’은 항일독립운동가의 산실이다. 안동에서 배출된 독립유공자는 서울의 208분보다 많은 250분이나 된다. 안동은 “안동군이 만주로 옮겨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일본 치하에서 독립투쟁에 적극적으로 매진한 고장이었다. <영남신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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