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글과 말
우리들의 글과 말
  • 승인 2019.02.25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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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윤 새누리교회 담임목사
며칠 전, 권정생 선생의 ‘몽실 언니’를 다시 읽었다. 갑자기 ‘권정생 선생’이 그리워졌기 때문이다. 생전에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그 분이 그리워지다니 좀 생뚱맞기도 하다. 배달되어 온 책의 표지를 넘기니 커다란 글자와 넉넉한 여백이 소년 소설임을 말해 준다. 초등학교 저학년이라도 읽어낼 수 있음직하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고 읽기 쉽게 편집되어 있어서 책장이 빨리 넘어간다. 몇 페이지를 금방 넘기니 친절하게도 그림까지 깃들여 있다. 새 책을 구입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발휘되는 속독이 그 그림 때문에 멈칫거린다. 아, 이 책은 그렇게 빨리 읽으면 안 되는데. 잠시 책을 덮었다가 다시 첫 페이지로 돌아왔다.

한글을 배운 후, 처음으로 책을 읽는 아이의 마음으로 첫 문장부터 천천히 읽어나갔다. ‘일본이 전쟁으로 망하고 나서 우리는 해방을 맞이했다’ 그 책의 첫 문장이었다. 아이들에게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가르치려는 듯 선생의 문장은 군더더기가 없고 간결하다. 한 두 페이지를 읽으니 권중생의 삶이 보인다. 이 작가는 이런 삶을 살았겠구나 하는 느낌이 밀려온다.

갑자기 초등학교 시절, 몇 번이고 읽었던 오렌지색의 동화책이 기억에 되살아난다. 이원수 선생의 ‘오월의 노래’였다. 그의 동화를 읽고 또 읽으며 나는 이원수 선생의 성품이 이러저러하리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된 그 분의 성품이 내가 생각한 것과 너무 비슷하여 놀란 적이 있었다.

글과 말은 그의 인격을 이리도 잘 드러낸다. 권정생 선생의 인품이 ‘몽실 언니’의 한 문장 한 문장에 녹아 있는 듯하다. 간결하고 품위가 있고 따스하다. 박경리 선생의 ‘토지’를 한 문장 한 문장 꼼꼼히 읽어 본 이래, 참 오랜만에 그렇게 글을 읽어 본다. 이런 글을 쓴 이원수, 권정생, 박경리 선생은 어떻게 말했을까? 갑자기 내가 쓴 글과 내가 한 말들이 부끄러워진다. 열정을 빙자한 내 글은 욕정이 배어 있고 비판을 빙자한 내 글에 가시가 돋아 있다. 설교로 뱉어지는 나의 말은 너무 혼잡하고, 토의로 흩어지는 내 언어는 너무 가볍다.

그러고 보니 최근 정치권에서 흘러나오는 말의 홍수에는 인간들의 온갖 누추함이 흘러 다닌다. 드라마 속에서 주고받는 배우들의 대사가 사납고 거칠다. 그들이 사용하고 뱉어내는 말과 글에는 오늘 우리들의 심성이 담겨 있다. 우리는 이렇게도 거칠고 투박스런 마음을 말과 글로 드러내며 살아간다. 대한항공이라는 재벌 총수 부인의 말이 오랫동안 우리 사회를 오염시키더니 최근 그 딸이 집에서 한 폭언이 공개되어 충격을 더하고 있다. 그 추악한 말들이 아내가 남편과 아이들에게 한 것이라니 상상하기도 힘들다.

하긴 목사들의 설교도 다를 바가 없으니 할 말이 없다. 설교와 강의 등을 통해 흘러나오는 종교인들의 말도 품위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사람들을 자극하고 재미를 유발하려는 듯 거칠고 가볍다. 그런 말과 글에 피곤해 하던 차에 권정생 선생의 글은 샘물과 같은 기쁨을 준다.

권정생의 동화, 그의 글에는 잊어버린 우리들의 심성이 녹아 있다. 착하고 따뜻한 우리 민족의 심성이 그의 글에 부끄러운 듯 남아 있다. 이 차에 좋은 동화 몇 권을 더 읽어 볼 요량이다. 천천히 그리고 꼼꼼히 읽어 보며 거칠고 투박해진 내 말과 글에 쉼을 주려 한다.

‘몽실 언니’ 가 불편한 다리로 걸어와 조용한 미소로 내 손을 잡는다. 조금은 누추한 옷을 입은 그녀는 얼굴도 그리 곱지 않다. 그러나 내 누이 같은 편안함이 그의 손을 통해 전해 온다. 꿈이구나. ‘권정생’을 생각하다 ‘몽실 누님’을 뵈었다. 꿈에서 깨어 일어나니 책을 몇 권 더 구입하여 지인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충동이 마구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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