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의 행복
명절의 행복
  • 승인 2019.02.25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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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란(주부)
어린 시절 설날은 축제였다. 설 전날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는 어른들의 말씀에 밤늦도록 뜬 눈으로 있었지만, 끝내 잠이 들었다. 몽롱해져서 참지 못하고 혹시라도 눈썹이 셀까 걱정을 하면서도 웃었던 기억이 난다. 잠 못 자는 고문도 있지만, 그 때는 그것도 놀이였다. 어른들도 자신들의 말을 듣고 잠을 자지 않는 아이를 보며 웃음을 머금었던 장면이 눈에 선하다.

설날 새벽 일찍 일어나면 춥다. 장작불을 지펴 끓인 뜨거운 물로 세수를 하고 설빔을 입는다. 작고 네모난 상에 떡국과 조기를 놓고 신주단지쪽에 절을 한다. 보이지 않고, 본 적도 없는데 있다고 믿고 경건하게 절을 한다. 우리집을 지켜 줄 거라는 믿음, 우리집을 지켜달라는 기원이리라. 절이 끝나면 높은 곳에 음식을 올려 놓는다.

다음에는 살아있고, 눈에 보이는 할머니와 부모님께 세배를 드린다. 할머니와 부모님은 어린 자식이 절하는 것이 기특하여 웃으시며 덕담을 건넨다. 올 한 해도 건강하고, 탈없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잘지내라고 하시며 세뱃돈을 건네준다. 호주머니에서 꺼내 주신 돈은 많지는 않아도 부자가 된 것처럼 기쁘다. 새해 첫날 절을 하면 왜 돈을 주는 걸까? 지금 생각하니 신기하다. 평소에는 돈을 잘 주지 않아서, 어른들이 큰절을 받아서 주는 것일까? 세뱃돈의 유래가 궁금해진다. 그러나 그 때의 어린 아이들도, 현재의 아이들도 세뱃돈은 받는 풍습은 좋아한다. 아마 이 풍습은 없어지지 않을 것 같다.

큰집에서 사촌오빠들이 세배를 드리러 온다. 새벽부터 집이 두 배로 왁자지껄하다. 세배가 끝나면 다시 큰집으로 가서 제사를 지낸다. 큰집에는 큰아버지와 큰엄마가 제사지낼 준비를 하고 계신다. 제기로 쓸 접시를 꺼내 하나하나 깨끗이 닦는다. 음식에 따라 접시크기가 달라 필요한 접시를 건네드린다. 오빠들과 사촌오빠들이 있고 막내딸인 홍희가 빙 둘러서서 제사를 지낸다.

제사가 끝나고 지방을 불에 태우고 나면 맛있는 것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특권을 받는다. 많이 먹지는 못하지만 막내라 귀여움을 받는 것 같아 풍요롭다.

다시 홍희네 집으로 와서 제사를 지낸다. 엄마가 정성스레 차린 제사나물로 무친 비빔밥까지 먹고나면 배가 부르다. 바로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 오랜만에 보는 큰집, 작은집 식구들끼리 이야기를 많이 한다. 작년 농사이야기, 올해 농사지낼 이야기, 직장다니는 사촌오빠들 직장이야기, 대학다니는 오빠들 취직이야기, 공부이야기, 결혼할 나이가 된 오빠들의 연애이야기. 서로 관심가져주고, 서로 걱정해주고, 서로 정을 나눈다. 할머니는 별 말씀이 없이 흐믓한 미소를 짓고 바라본다. 제일 나이 많은 사촌오빠가 할머니 살아계실 때 결혼해야할텐데라는 이야기에선 다들 할머니가 오래오래살아계시기를 바라는 한마음이다. 설은 한 해의 첫 축제처럼 행복했다.

그 때 엄마는 무얼하고 있었나? 제사음식준비는 엄마가 했다. 몇 번씩 장을 본다. 고기, 생선, 집에 없는 사과와 배를 산다. 농사지은 나물을 준비하고, 흙속에 묻어둔 밤을 꺼낸다. 한 가지라도 제사상에 놓고 싶어하고 좋은 걸 올리려고 애를 쓴다. 농사가 없는 겨울철이라 설음식장만하는 것도 즐거웠을까? 제사를 마친 이웃들이 찾아와 엄마는 술상을 내갈 때도 즐거웠을까? 엄마는 힘이 들었는데도 말을 못했을 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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