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됨됨이가 아니거든 서도를 전하지 아니했다
사람 됨됨이가 아니거든 서도를 전하지 아니했다
  • 김영태
  • 승인 2019.02.25 21:1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62년 정부 주도 전람회 國展 참가
해서 작품 2점 중 ‘안국사비문’ 선정
이듬해 ‘다보탑비문’으로 연속 입선
1963년 개인 서실을 서당으로 발족
붓글씨 길잡이 격인 법첩 공부 강조
인간의 도리와 바른 마음가짐 중시
국전
제11회 국전(1962년) 전시장(덕수궁 석조전) 앞에서 소헌 선생 기념 촬영.

 

소헌 김만호의 예술세계를 찾아서 (11)-장년시절2. 1962년(55세)~1963(56세)

 

◇국전과의 인연

중년의 소헌 선생(55세)에게 서도(書道)는 깨달음을 향한 신앙과 다름없었다. 선생은 오로지 서도의 본질만을 탐구하였고 서도를 통한 인격 수련에만 정진하였다. 서도는 오로지 서도만을 위해 이 길을 가야 한다고 스스로 고집해 왔던 것이다. 서도는 자신의 내면으로 응축되는 힘이지 남을 향해 밖으로 드러내는 재능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선생에게 서도란 차라리 종교였다. 그것은 순수정신의 계발 작업이었다. ‘깨달음’을 찾는 구도(求道)의 형자(荊刺)의 길이었다. 그 ‘깨달음’ 을 위해 조용히 서도의 길을 가고 있었던 것이다.

공정성에 의문을 품은 까닭에 국전에 관심 없던 선생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시기는 이즈음이었다. 선생은 일제강점기의 「선전(鮮展)」이 해방 후 지속되어 서울에서 해마다 「國展(국전)」이 열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국내의 유일한 공모전이었다. 그러나 강점기 1943년 36세때 일본 오사카서도전(大阪書道展)에 처음 출품하여 입선한 적은 있었지만 공모전 출품은 소헌 선생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일제강점기 식민지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경성(서울)에서 개최하였던 미술전람회인 「선전(鮮展)」이 1944년 23회를 끝으로 폐지되고 해방후 1949년에 「국전(國展)」으로 명칭이 바뀌어 정부가 주도하는 전국 규모의 관전(官展)이었다. 당시에는 유일한 예술가의 등용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의 잔재가 남아 있어서 친일(親日)의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수상자 선정에 지연, 인맥 등의 요인도 작용하여 공정성 시비가 있었고 심사 관련 비리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때마침 선생은 1961년 신문 지상에 발표된 국전(10회)의 서예부문 입상자 명단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다른 지방과 달리 대구 경북의 입상자 이름을 거의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수상자 선정에 있어서 공정성의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대구 경북에서는 너무나 형편없는 흉년이었다.

선생은 이 지역 경북의 서도가 국전에 왜 인정을 못 받고 뒤쳐져 지고 있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았다. “다음 해에는 우선 나부터 한번 출품해서 전국에 당당하게 겨루어 보리라”는 마음을 먹고 다짐을 했다. 1962년의 제11회 국전에 응모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소헌선생국전첫입선작
소헌 선생의 국전 첫 입선 작품 ‘안국사비문(安國寺碑文)’

선생은 마감일 며칠 전 새벽에 2층 서실로 올라가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가다듬어 유공권(柳公權)체로 해서(楷書) 작품 2점을 썼다. 이 중 한점인 「안국사비문(安國寺碑文)」이 당당히 입선되어 덕수궁 석조전에서 전시가 되었다. 그 당시 국전 입선은 대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 큰 영광이었다. 주변에서 축하의 인사가 많았다. 의성김씨화수회, 의성김씨재구청송파친목회, 평익계, 평우동지회와 윤병락씨가 축시(祝詩)를 보내왔고 경북한의사회에서는 향미식당에서 축하연(祝賀宴)을 베풀어 주었다. 참석자는 여원현, 정화식, 변정환, 김수욱, 신현덕, 김성수, 조경제, 김정규, 조용주 제씨 등 50여명이었다.

국전의 입선으로 서도의 자신감을 얻은 선생은 그 이듬해에도 출품하여 연달아 입선하였다. 1963년 12회 국전의 입선작은 안진경(安眞卿)체의 해서(楷書) 「다보탑비문(多寶塔碑文)」이었다.

◇봉강서당 발족

국전 연입선은 선생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입소문이 나면서 서실(書室)을 찾는 사람이 늘어났고, 서도에 대한 토론을 요청하는가 하면 개인지도를 부탁하는 사람도 있었다. 선생은 2층 서실을 누구나 공부할 수 있는 공간으로 문을 활짝 열어 개방했다. 1961년에 신축한 한의원 건물 2층에 있었던 서실(書室)이 실질적으로 1963년(癸卯) 5월 1일에 「봉강서당(鳳岡書堂)」이라는 명칭으로 발족이 되었다. 주동 인물은 권혁택, 신점순, 김석환씨 등이었다. 서당의 이름을 봉강(鳳岡)이라고 한 것은 대봉동의 언덕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실을 찾는 이들에게 선생의 가르침은 엄격했다. 서도 이전에 인간의 도리, 글씨의 중요성 등 원론부터 가르쳤다. 선생은 봉강서당을 찾아오는 초보자들에게 왕희지가 말한 ‘비인부전(非人不傳’이라는 뜻부터 가르쳤다. 사람의 됨됨이가 아니거든 서도를 전하지 말아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서도를 하기 전에 인격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던 것이다. 선생은 서(書)는 심화(心畵)이며 인격(人格)이라고 믿고 있었다. 마음가짐을 바로 한 후 서도의 길에 들어서야 한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붓글씨 초보자에게는 선생은 법첩(法帖) 공부를 강조했다. 이는 기본 중의 기본으로써 글씨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선생 자신도 항상 법첩의 해서(楷書) 쓰기를 일상화 하였다. 이러한 결과 선생의 작품은 한결같이 해서가 바탕이 된 것으로 발표가 되었다. 이로서 영남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해서 법첩을 논할 때 소헌 선생의 작품이 서예인들에게 귀감이 되는 유명세를 탔다.

학서자(學書者)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의 한 가지는 좋은 법첩을 널리 보고 감식할 줄 아는 힘을 기르는 노력이라고 본다. 이는 마치 작문 수련을 할 때 남의 명문을 다독(多讀)하면서 작법의 다사량(多思量)하는 일이 그 작품에 못지않는 긴요한 일인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선생은 항상 “필의(筆意)를 터득하면 원탁(原拓)과 어긋난 자획(字劃)을 찾아낼 수 있고, 보이지 않는 곳도 붓 간 자취를 더듬을 수 있게 된다. 백년, 천년 전의 명필과 호흡을 같이 하면서 운필(運筆)의 완급(緩急)이나 강유(剛柔)를 피부로 느끼게 될 때 그 법첩은 학서자에게 옳은 길잡이 구실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법첩을 배우는 의의가 있는 것이다”라고 강조하였다.

이 무렵에 대구의 서예가들의 모임인 ‘해동서화협회’가 있었는데 가입을 요청해서 뜻을 같이 했다.

 

서법정전-표지
'서법정전(書法正傳)' 표지 사진

 
소헌선생-서법정전
소헌선생이 '서법정전' 뒤 표지 안에 자필 기록한 '학서십년(學書十年)'

◇서법정전(書法正傳)

서도에 뜻이 있는 이들에게도 그러했지만 선생 역시도 서도 이전에 정서(正書)를 중시하였다. 특히나 우연한 기회에 중국장화세전서법정전(中國蔣和世傳書法正傳)」를 만나면서 선생은 정서에 더욱 몰입하였다. 「중국장화세전서법정전(中國蔣和世傳書法正傳)」를 손에 넣는 경위는 드라마틱했다. 선생의 붓글씨 기초가 되어준 법첩의 관심이 하늘에서도 통하였는지 나이 54세 때(1962) 가을 어느 날 꿈속에서 한 노인을 만나 귀한 책 한 권을 선물 받았다. 그 책은 바로 선생이 애지중지하던 「중국장화세전서법정전(中國蔣和世傳書法正傳)」(총 114면)이다. 이 책은 선생에게 정서(正書)에 대해 눈을 뜨게 하고 서도 연마에 큰 빛이 되었다.

운명과도 같은 이 때의 책의 입수 경위를 소헌선생은 매일신문에 연재된 「나의 회고 김만호」(1987.9.25)에 소상히 밝혀 놓았다. 그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여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1992년(壬寅年) 어느 가을날이었다. 나는 곤한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꿈속에서 한 노인을 만나게 됐다. 그 노인은 나에게 귀한 책 한권을 건네주었다. 나는 무심코 그 책을 받아 들었다. 그 순간 나는 잠을 깼다.

사실은 내가 잠을 깬 것은 집 앞을 지나가는 엿장수의 가위소리 때문이었음을 눈을 비비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신통한 꿈 때문에 지나가는 엿장수 노인을 불렀다. 노인은 내가 엿을 사기 위해 불렀다고 생각한 나머지 얼마너치 사겠냐고 물었다. 나는 10원어치를 달라고 청했다. 노인은 깊숙한 데서 책을 한권 꺼내 몇장을 찢으려고 했다. 엿을 싸주기 위해서였다.

순간 나는 깜작 놀라고 말았다. 막 찢으려고 한 그 책이 예사로운 책이 아니라는 직감이 불현 듯 스쳤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노인에게 바짝 다가가서 못찢도록 막았다. 나의 느닷없는 행동에 노인은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말했다. 「이 책은 못쓰는 것입니다. 엿을 싸드리려는데 왜 그러시오?」

나는 장황한 설명을 할 겨를도 없이 그 책을 뺏은뒤 책의 제호를 들여다 보았다. 그런데 신통하게도 그 책은 「中國蔣和世傳書法正傳」이었다. 나는 50원을 주고 노인으로부터 그 책을 샀다. 노인은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가위질을 하며 사라졌다.

동화 속에서 나오는 이야기와 같은 이 일화 한 토막은 나에겐 큰 사건이 아닐수 없었다. 그책이 正書에 대해 눈 뜨게 해 주고 나름의 書道에 큰 빛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 책은 당시에 국내에서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내가 그 귀중한 책을 구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는데 뜻밖에도 엿장수 할아버지에게서 구할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그 책을 읽고 또 읽고 수도없이 읽었으며 書道에 새로운 전기를 마지하게 되었다. 나는 그 책에서 正書에 대한 이론을 도출해 내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973년(癸丑) 1월 1일부터 는 그 책으로 특강에 들어 갔으며 지금도 기회가 있으면 뜻있는 사람들에게 正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또한 그 소문이 번져 책을 복사하러 오는 사람도 많았다.”

◇제3공화국 출범(1963.12.17)

1963년 4월에는 선생의 고향인 의성군 사곡면 오상동에 있는 오토재(五土齋) 재사(齋舍)의 도유사((都有司)를 맡았다. 선생이 태어날 시기에 부친이 맡으신 바 있는 의성김씨 재사인 오토재 도유사를 아들인 선생이 또 맡게 된 것이다. 흔치 않는 일이라 생각된다. 당시 “계묘 10월 묘전(墓奠) 때 수십년간 끌어오던 안동파와 청송파 간의 시비를 해결하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묘전을 동일(同日) 행사하고 음복(飮福)도 한가지 하기로 하다”라고 비망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 시기의 정국은 제3공화국이 들어서고 사회가 정화되고 시국이 안정되어 가던 시기였다.

5·16 군사혁명(1961년)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박정희)는 사회적 무질서와 정치적 혼란을 바로 잡는데 혼신의 노력을 했고, 산업화 과정을 이끌기 위해 이듬해인 1962년에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발표하고 경제성장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경제시책을 펼쳐나가고 있었다. 이때 우리의 1인당 국민총생산량인 GNP는 90불(1962.통계)이었다.

1963년은 민정(民政)으로 이양하기 위한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였다. 대통령 후보 박정희(공화당)와 윤보선(민주당)의 국민 직접선거에서 박정희가 당선되고 12월에 대통령 취임을 하였다. 이로서 제3공화국이 출범하게 된 것이다.

이무렵 선생의 비망록을 들쳐보면 “세인칭(世人稱) 의(醫)·약(藥)·시(詩)·서(書)·화(畵)·기(棋)·금(琴)·오행잡서(五行雜書)에 능해 무소불능(無所不能)이라하나 무일불능(無一不能)하여 만년에는 의술지생업서도(醫術之生業書道)에만 열중하기로 하다“라는 결심이 적혀 있다.

선생은 50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오직 서도(書道)에만 정진하면서 인술(仁術)의 길 만 걸을 뿐 다른 모든 잡사(雜事)와는 벽을 쌓았다.

김영태 영남대 명예교수(공학박사, 건축사)

관련기사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