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석에 새겨진 그날의 참극…그 어떤 영상보다 생생했다
비석에 새겨진 그날의 참극…그 어떤 영상보다 생생했다
  • 김광재
  • 승인 2019.02.28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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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내 독립만세운동 사적지를 가다
유관순 기념비에 새겨진 비문
반듯한 서체·심상찮은 맞춤법
위당 정인보 선생이 지은 글
일중 김충현 선생이 쓴 것
기념비
충남도 기념물 제58호 아우내 3.1운동 독립사적지의 기념비. 비문은 위당 정인보 선생이 지었고, 글씨는 일중 김충현 선생이 썼다.

처음 병천에 들른 것은 순대국밥 때문이었다. 10여 년 전, 전세버스를 타고 경기도 파주에 견학을 갔다 오면서 저녁을 먹기 위해서였다. 유명한 병천순대의 병천(竝川)이 우리말 아우내를 한자로 바꾼 것이란 사실을 국밥을 먹으며 비로소 깨달았다. 해는 지고 돌아갈 시간이 바빠, 언젠가 다시 아우내에 와보리라 생각하며 버스에 올랐다.

몇 년 전, 서울에서 일을 보고 내려오는 길에 아우내에 들러 유관순 열사 기념관, 추모각, 생가를 둘러볼 수 있었다.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다시 아우내를 찾았다. ‘다른 일 보러 갔다 오는 길에 들른’ 게 아니라, 유관순 열사 사적지를 찬찬히 둘러보기 위한 여행이었다.

아우내 거리 곳곳에는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고, 아우내 봉화제가 열리는 2월 28일 저녁 교통통제를 한다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스마트폰 지도를 열었더니 아우내 중심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아우내장터’라는 이름으로 문화재 표지가 있었다. 지난번 방문했을 때 가보지 않은 곳이어서 먼저 가보기로 했다.

도로변에 ‘기념물 제58호 아우내 삼일운동 독립사적지’ 표지석이 서 있다. 돌계단을 올라가니 운동장에서 어르신들이 게이트볼인지 그라운드골프인지 운동을 하고 있었고, 그 위쪽 언덕에 기념비가 하나 서 있었다. 장터가 아니라 장터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만세운동 기념비를 세운 것이었다. 비석 정면에 큰 글씨로 “긔미 독립운동 때 아내서 일어난 장렬한 자최라.”라고 새겨져 있었다. 맞춤법이 심상치 않고 빗돌에 얼룩도 짙어 오래된 비석임을 알 수 있었는데, 반듯한 한글 서체가 반가웠다. 그런데 ‘아내서’가 대체 무슨 뜻이지? 아우내를 잘 못 쓴 것일까? 3.1운동 때 외국 동포들이 벌인 만세운동을 염두에 두고 ‘안에서(국내에서)’란 의미로 쓴 걸까? 별로 그럴듯하지 않은 생각들만 떠올랐다. 나머지 세 면에 새겨진 글을 천천히 읽어나갔다.
 

유관순열사동상
유관순 열사 사적지에 있는 열사의 동상.

“긔미 독립 운동때 아내서 일어난 장렬한 자최라. 긔미 삼월 일일 독립선언이 나며, 국내 국외에 만세소리 서로 연하얐었다. 그 가운데에도, 충남 목천 아내장터 일은 가장 장렬한 운동의 하나다. 그날, 적의 총칼에 넘어진 이만 노소남녀 스무 분이요, 옥에서 궂긴 이 한 분이니 이 한 분이 곧 어린 녀학생 유관순, 열여섯에 이 일을 일으켰다. 음력 삼월 일일은 아내장이다.”

아, 아우내를 아내로 쓴 것이로구나. 아마 이 고장의 옛 어르신들은 아우내를 ‘아:내’라고 발음했던가 보다. 그런데 ‘총칼에 넘어진 이’, ‘옥에서 궂긴 이’라는 표현이 예사롭지 않았다. 죽음이니 사망이니 하는 적나라한 말 대신 쓴 ‘넘어진’이라는 표현이, 비문을 쓴 이의 참담한 마음을 더욱 무겁게 전해주고 있었다. 더듬더듬 계속 읽어나갔다.

“어린 녀학생의 높은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자 온 장터가 만세 속에 들었다. 독립정신 내미는 앞에 총칼이 보이지 아니하니, 마츰내 많은 피가 흘렀다. 유관순은 잡히었다. 묶여 드는 여러 사람을 보더니 소리를 높여 오늘 일은 다 내다. 적이 보니 어린 녀학생이다. 일은 크다. 나는 적다. 온갖 악형을 다하며 누가 한 것을 대라고 하얐으나, 오즉 내다라고 할 뿐이었다.”

가슴을 벅차게 만드는 절묘한 문장들이 이어졌다. “온 장터가 만세 속에 들었다. 독립정신 내미는 앞에 총칼이 보이지 아니하니, 마츰내 많은 피가 흘렀다.” 이 짧은 문장이, 그날을 재연한 어떤 영상보다 더 생생하게 그날의 아우내장터를 보여주었다. 장터를 가득 메운 3천여 군중의 만세 소리, 결연한 표정들, 그리고 일본 헌병들의 잔혹함까지 ……. 누구일까? 이런 비문을 지은 사람은. 비문의 마지막 부분으로 가서 보았더니, “뎡인보는 짓고 김충현은 쓰다. 유관순기념사업회 세움.”라고 적혀 있었다.

최남선 이광수 등 지식인들의 훼절이 이어지는 가운데에도 끝까지 지조를 지켰던 위당 정인보(1893~1950) 선생이 지은 글을, 한글 서예 보급에 일생을 바친 일중 김충현(1921~2006) 선생이 쓴 것이었다. 광복 후 유관순기념사업회가 꾸려져 기념비를 세울 적에 위당 선생에게 비문을 부탁했을 것이고, 위당 선생은 당시 20대였던 일중의 한글 글씨로 새기도록 했을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는 이 ‘유관순 기념비’가 해방 이후 최초의 한글 비문이며, 이후의 한글 비문 제작에 견인차가 되었다고 서술돼 있다.

 

유관순열사표준영정
유관순 열사 표준영정.

“그 아버니 유중권과 어머니 이씨 그 자리에서 총살을 당하고, 유관순은 끝끝내 굴하지 아니하야, 증역 삼년이 다시 칠년이 되더니, 얼마 아니하야 궂기니 잡히던 이듬해 십월이다. 처음 일어나던 날, 유씨 집 부부보다 먼저 김구응은 그 어머니 최씨와 모자 함께요, 조인원·김상헌·서병순·박상규·전치관·한상필·윤희천·유중오·윤태영·이성하·박병호·신을우·박유복·박영학·방치석·박준규다. 한날 적의 총칼에 넘어진 분들이니, 응해서 일어난 이, 일으킨 사람과 둘이 아니요, 이듬해 옥사가 그 날의 죽음과 다름이 없다. 형제야, 자매야, 선렬들의 피빛이 이즉것 새롭다. 이 자최를 돌에도 사기거니와 서로들 마음에 사기라. 대한민국 이십구년 십월”

비문에는 당시 잘못 알려진 사실들이 일부 포함돼 있다. 비문과 달리 유관순 열사는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형,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다. 유 열사가 순국한 날도 10월이 아니라 9월 28일이다. 또 ‘그날, 적의 총칼에 넘어진 이’도 스무 분이 아니라 열아홉 분이다. 하지만 이런 오류가 이 비문의 가치를 떨어뜨리지는 못한다.

최근 결정된 유관순 열사의 서훈 승격과 관련해 찬반 양쪽의 주장이 맞섰다. 모두 일면의 타당성이 있다. 다만 앞장선 사람과 따라 일어선 사람이 둘이 아니고, 그날의 죽음과 유관순 열사의 옥사가 다르지 않다는 위당 선생의 뜻을 헤아려보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비문의 날짜 또한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아우내장터에서 첫 만세 소리가 터져나온 열흘 뒤인 1919년 4월 11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대한민국 이십구년’은 바로 서기 1947년이다. 정부수립일을 건국절로 하자는 주장대로 한다면, 유관순 기념비는 ‘대한민국 -1년’에 세워진 것이 되고 만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유관순 열사가 순국한 지 28년 만에,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라고 한 그 나라를 되찾은 지 2년 뒤에, 즉 대한민국 29년에 이 비가 섰다.

그런데 이 유관순 기념비의 기단과 비석의 모양이 일본 양식인 것은 지독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한 세대를 넘는 기간 동안 그러한 양식의 비를 제작해온 관행을 무심하게 답습한 탓이리라. 비석의 양식뿐만 아니라, 식민지 35년 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잃어버린 것일까. 35년의 두 배가 흘러간 지금도 되돌려야 할 것들은 곳곳에 숨어있을 것이다. 위당 선생이 지은 삼일절 노래의 가사에서 “선열하, 이 나라를 보소서”라고 말한다. 그 말에는 선열들께 부끄럽지 않은 나라를 만들겠다는 포부와 다짐도 서려 있을 터이다. 김광재기자 contek@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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