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 독립 호소하자” 유림들 백세각서 ‘파리장서’ 작성
“세계에 독립 호소하자” 유림들 백세각서 ‘파리장서’ 작성
  • 배재욱
  • 승인 2019.03.03 21: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혼자서 만세 외쳤던 이현기
지역 독립운동 전개 자극제로
유림-기독교인들 힘 모아
1919년 4월2일 다같이 “만세”
HL09_0205_01
성주의 야성송씨 문중이 1919년 파라강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의 서명과 성주지역 만세운동 참여를 논의했던 백세각.

 

3 ㆍ1 운동 100주년 배재욱의 대구경북 역사기행 <5·끝> 성주

경북 성주에서의 3.1만세 운동은 1919년 3월 27일에 일어났다. 선남면에서 이현기가 20~30명의 사람들이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를 불렀다. 이 사건은 성주의 첫 3.1 만세 운동이었다. 그리고 이현기는 성주읍에서 열리는 오일장에 가서 혼자 만세를 불렀다. 이현기의 단독 독립만세 사건은 성주 군민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사건은 4월 2일에 만세를 부르고자 준비하던 성주군의 기독교인들과 유림들에게 계획을 본격적으로 실행케 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당시 성주의 기독교인들은 성주군 대가면의 유진성을 중심으로 4월 2일에 성주 장날 만세를 부르고자 준비했다. 그러던 차에 기독교 측의 유진성은 유림 측에서 같은 날 만세 같은 곳에서 만세를 부를 준비를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유림 측의 송회근을 찾아가 연합으로 만세를 부르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유진성은 송회근에 유림 측에서도 태극기를 만들어 오도록 부탁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성주군의 본격적인 만세 시위는 성주군의 기독교 측에서 우림측보다 더욱 능동적으로 준비하고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평가해야 한다. 그것은 유진성이 송회근을 찾아가 같이 만세 운동을 부르자고 말하고 그에게 태극기를 만들어 오도록 부탁했다면 기독교 측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유림 측에 그렇게 부탁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몇 가지 경우의 수가 있었을 것이다. 1. 기독교 측에서는 이미 태극기를 만들고 있었는데 유림측에서는 태극기 없이 만세를 준비하는 것을 알고 만세를 부르기 위해서 태극기도 준비해야 되니 태극기도 준비하라고 부탁했을 것이다. 2. 이미 유림측이 태극기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유림측은 태극기 제작을 맡고 기독교측은 독립선언서를 만들어 오도록 하는 분업을 했을 수도 있다. 3. 기독교측과 유림측에서 만세 운동을 각각 준비했지만, 재판정에서 유림측이 기독교측에 책임을 전가하여 기독교 신자인 유진성이 유림측 송회근에게 태극기 제작을 부탁했기에 유림측에서 태극기를 만들었다는 책임을 전가하는 방편으로 그렇게 말했을 수도 있다.(기독교인 유진성과 유림측 송회근이 4.2 성주 만세 운동을 이끈 공동 주동자라면 같은 형량으로 책임이 지워져야 하겠지만, 유진성은 징역 2년을 언도받고 송회근은 징역 1년을 언도받은 것을 보면 일본 경찰은 4.2성주 만세 운동의 주동자를 유진성으로 파악했다는 명백한 기록이 된다.) 4. 일본 경찰이 이미 대구 경북지방에서 기독교인이 중심이 되어 3.1만세 운동이 일어난 것을 알고 있었기에 기독교인에게 책임을 지워 기독교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그렇게 조서를 꾸몄을 수도 있다.

필자는 위의 4가지 경우의 수 중에서 1번이 가장 맞는 경우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4월 2일 오후1시에 기독교인들이 성주읍 시장으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행진한 것을 보고 모여 있던 유림측에서도 만세를 불렀던 것을 보면 태극기를 기독교 측과 유림측이 각각 준비 해 왔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당시에 학교가 있는 대구나 안동같이 학교가 있는 지역이 아니면 독립 선언서를 등사할 여건이 되지 않았기에 다른 곳에서 독립 선언서를 가져 왔던지 이미 독립 선언서를 다른 지역에서 낭독했기에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는 일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여 태극기를 만들어 흔드는 것으로 만세 운동을 전개했을 것이다.

위의 4가지 경우의 수 외에 다른 경우를 상정할 수 있지만 어떤 경우의 수를 생각하더라도 기독교인 측에서 유림측 보다도 더욱 능동적으로 3.1만세 운동을 준비하고 행동했다고 판단된다. 그런데 후세의 역사가들은 성주에서의 3.1만세 운동을 기술하면서 기독교 측에서의 만세 운동보다도 유림측의 만세 운동을 앞세우고 있고 성주군을 대표하는 만세 운동을 유림의 만세 운동을 근간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은 역사적인 맥락을 잘못 해석한데 따른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현상은 성주군이 성주군은 대표하는 독립운동으로 유림측의 파리장서로 부각시키면서 유림의 만세 운동을 앞세운데 따른 현상이라고 본다. 즉 역사가들은 성주의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만세 운동을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하고 있다.

백세각항일의적비
백세각 항일의적비.



유림측의 파리장서 사건은 우리 민족의 자랑스런 역사이고 그것은 당연히 장려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것 때문에 역사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 것은 자랑스런 역사를 잘못된 방향으로 돌리는 것은 또 하나의 역사왜곡이다. 1919년 4월 2일 오후 1시에 성주읍의 장날에 기독교인들이 먼저 만세를 부르면서 시장으로 몰려들자 이미 시장에 몰려 있던 유림측 인사들도 호응하여 만세 운동에 불이 붙었다. 민족사적으로 볼 때 평화적인 운동으로 3.1 운동이 시작되었지만, 일본 경찰의 강압적인인 진압으로 인해 군중들의 분노가 높았고 이런 분노가 나중에는 독립 운동에서 무장 투쟁으로 발전되어 독립군이 조직되는 엄청난 결과로 이어졌다.

경상북도가 지정한 유형문화재 제163호인 백세각은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에 있는 조선시대 문신 송희규(宋希奎)가 건립한 누각이다. 야계 송희규가 윤원형과 이기를 탄핵한 것 때문에 귀양살이를 한 후 성주로 돌아와 1561년(명종 16년)에 백세각을 지었다. 백세각은 쇠못을 사용하지 않고 나무에 구멍을 뚫어 싸리로 얽었다. 또한 대패질을 하지 않고 자귀만으로 깎아 다듬어 만든 건물이다. 이 백세각은 1919년 3ㆍ1운동이 일어난 뒤에 경북 유림단 파리장서 사건의 모의 장소로 사용되어 3ㆍ1독립운동과도 관련이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독립선언서에 서명을 반대한 유림측이 3·1운동 전국적으로 일어나 온 민족의 운동이 되는 것을 본 뒤에 조선 백성들이 이 일에 대하여 유림 측을 비판하자 뒤 늦게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는 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장문의 서한을 작성하였다. 파리장서 사건은 전에 의병을 일으켜 항일투쟁을 했던 호서지방의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대부분 의병에 참여하였던 유림에 의해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에 대한 주장을 담은 서한을 작성했지만 이들이 작성한 서한은 현존하지 않는다. 이때 영남지방 유림에서도 곽종석(郭鍾錫)·김창숙(金昌淑) 등이 중심이 되어 작성한 영남본을 전체 유림회의에 제출하였다. 호서본보다도 영남본의 내용이 더욱 포괄적이었기에 영남본을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키로 결정하고 134명 전국 유림대표가 서명하였다. 성주 백세각에 유림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준비를 하고 파리 장서 영남본을 작성한 곳으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이다.

파리장서운동은 세계 강화회의가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는 것을 알고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요구하고자 했던 사건이다. 이때 김창숙이 유림대표 137인이 서명한 ‘파리장서’를 휴대하고 상해로 향한 뒤에 국내에서는 일본 경찰에 의한 서명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전개되었다. 파리장서는 파리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전달되지 못하였지만, 이 사건은 유림의 전통적인 한계를 탈피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조선의 멸망에 대한 유림의 책임론 때문에 위축된 유림이 한국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하는 계기를 파리장서 운동에서 가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민족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유림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파리장서 사건은 성주군 유림의 단독 사건이 아니라, 영남 유림이 중심으로 작성한 장서가 전체 유림의 공식적인 문서로 채택되어 그 문서에 유림 대표들이 서명하여 파리에서 열린 세계 강화회의에 전달코자 했기에 이 사건은 한국 전체 유림의 독립 의지를 밝혀 준 사건으로 높은 평가를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성주군에서 일어난 1919년의 만세 운동은 다른 맥락에서 관찰해야 마땅하다.

이재원과 임종훈이 쓴 ‘성주군 기독교 110년사 1901-2011’는 이에 대하여 “‘성주의 3.1 운동은 유생들이 주도하였고 기독교 세력이 이에 협조, 연합하였다.’는 기록은 온전히 주객이 전도되는 감이 없지 않다.”라고 기록한다. 하지만 이들은 이것에 대한 언급을 이것으로 마치고 역사적인 해석을 하지 않는다. 경북성주에서 일어난 3.1 만세 운동은 유림측에서 보다도 성주의 기독교 측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성주의 유림 대표를 찾아가 만나고 협조를 구하고 1919년 4월 2일 성주 읍 만세 운동에서 먼저 행동을 개시하는 등의 행동으로 미루어 볼 때 기독교측이 더욱 적극적으로 4.1 성주만세 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래서 성주 4.2 만세 운동의 첫 머리에는 성주 기독교 신자들의 헌신과 나라 사랑이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영남신학대 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19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많이 본 기사
동영상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