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슬보다 학문에 뜻 둔 조선의 대학자…그의 제자만 300여명
벼슬보다 학문에 뜻 둔 조선의 대학자…그의 제자만 300여명
  • 김광재
  • 승인 2019.03.07 2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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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3년생…어려서부터 총명
비리 횡행하는 과거장 보고서
그대로 낙향해 학문에 전념
나라의 부름 거듭 거절치 못해
주로 외직서 학문·교화 힘써
퇴계학·남명학 통합하여
새 학통 세워 실학 연원 확립
예학·경서·의학·천문 등
모든 학문에 관심 가져
회연서원
회연서원 강당인 경회당과 동재, 서재.

 

 

성주 회연서원...한강 정구 선생의 삶과 업적


성주군 수륜면 회연서원 입구에는 조선 중기의 대학자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 선생이 대가천의 절경을 노래하며 도학의 이념을 읊은 무흘구곡에 대한 안내판과 조형물들이 서 있다. 무흘구곡의 1~5은 성주군, 6~9곡은 김천시에 있다. 제1곡은 회연서원 뒤에 우뚝 서 있는 봉비암이다.

봉비암 아래에는 원래 한강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쳤던 회연초당이 있었으나, 인조 5년(1627)에 지방 유림의 뜻을 모아 선생을 기리는 회연서원이 세워졌고, 숙종 16년(1690)에 사액됐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회연서원 편액은 내려졌으나 강당 건물은 보존됐다. 1974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51호로 지정되고, 이후 사당, 동·서재, 전사청, 견도루 등이 새로 지어졌다.

견도루 왼편에는 비신, 이수, 귀부가 온전하게 남아 있는 한강 정구 신도비가 서 있다. 신도비는 2품 이상의 품계를 받은 사람의 무덤 앞이나 길목에 세우는 비석이다. 이 신도비는 인조 11년(1633)에 수륜면 창평산 묘소 들어가는 길목에 세워졌다가, 한강의 묘소를 이장하면서 현종 3년(1668)에 회연서원 경내로 옮긴 것이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양쪽에 방을 넣었으며 가운데 대청이 널찍하다. 뒤뜰로 난 세 개의 창은 각각 두 짝의 창호 중간에 문설주를 세운 쌍영창으로 되어있다. 또 왼쪽 방 위에 제법 큰 다락문이 마당을 향해 나 있는데, 방안에서 다락으로 오르는 통로는 없으며 바깥에서 사다리를 놓고 올라갔다고 한다.

회연서원
회연서원 강당. 현판은 한석봉 글씨로 알려져 있으며 대청 왼쪽의 망운암 현판은 미수 허목의 글씨다.




회연서원 현판 글씨는 숙종의 어필이라고 하기도 하고, 한강 선생과 같은 해에 태어난 석봉 한호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라고도 하는데, 문화관광해설사는 석봉의 글씨라고 한다. 한강의 제자인 미수 허목이 전서로 쓴 불괴침, 망운정 현판도 눈에 띈다. 또 숭모각에는 한강 선생의 일생과 업적을 요약한 전시물들이 잘 정리돼 있다.

1543년 성주에서 태어난 한강은 어려서부터 총명했다고 한다. 종이모부인 오건(吳健)에게 주역을 배웠는데, 건괘와 곤괘만 배우고 나머지 괘의 이치는 스스로 깨쳤다는 말도 전해진다. 21세 되는 1563년에는 퇴계 이황을 찾아 문하에 들어갔고, 24세 때인 1566년에는 남명 조식을 배알하고 스승으로 모셨다. 21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봄 과거를 보러 상경했으나, 온갖 비리가 횡행하는 과거장을 보고는 그대로 낙향해 학문에 전념했다.

1573년 동향 출신 동강 김우옹의 추천으로 예빈시참봉에 제수된 것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 벼슬이 내려졌으나 대부분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나라의 부름을 거듭 거절하지 못해 출사하더라도 당쟁으로 시끄러운 내직을 피해 주로 외직에 있으면서 학문과 교화에 힘썼다.

 

한강 정구 신도비. 원래 묘소 길목에 세워져 있었으나 묘를 이장하면서 신도비는 회연서원 경내로 옮겼다.
한강 정구 신도비. 원래 묘소 길목에 세워져 있었으나 묘를 이장하면서 신도비는 회연서원 경내로 옮겼다.

 

회연서원 입구의 안내문은 그의 학문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한강 정구는 외증조 한훤당 김굉필의 도학을 전수하고, 그 기반 위에 퇴계학과 남명학을 통합하여 새로운 학통을 세워 실학의 연원을 확립하였으며, 우주 공간의 모든 것을 연구대상으로 삼아 경서, 병학, 의학, 역사, 천문, 충수지리 등 모든 학문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예학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대학자였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다방면에 걸친 한강의 저술 중 전하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임진왜란 때 해인사로 옮겨져 무사했던 그의 저술들이 노년에 그가 거처하던 집에 불이나 거의 소실됐기 때문이다. 그의 학문이 근기실학의 한 연원이 됐다고는 하지만 그 구체적인 부분을 살펴볼 수 없으니 아쉽다.

한강은 동향사람으로부터 무고사건을 겪은 뒤 70세에 고향을 떠나 칠곡의 노곡정사로 거처를 옮겼다. 그런데 72세였던 1614년 1월에 집에 화재가 일어나 100여 권이 재가 되고 말았다. 그는 타다 남은 서책들을 수습해 ‘오선생예설’만은 다시 완성을 했다. 이 화재 이후 한강은 현 대구시 북구 사수동의 사양정사로 옮겨 지내다 78세를 일기로 1620년 타계했다. 사수동 금호택지개발지구 내에는 선생의 이름을 딴 한강근린공원이 조성돼 있다.

 

무흘구곡 제 1곡 봉비암
무흘구곡 제 1곡 봉비암

 


특히 그가 편찬한 읍지가 모두 남아 있다면 옛 사람들의 생활을 더듬어 보는 데데 큰 도움이 됐을 것이다. 숭모각에는 한강이 함안군수 시절 펴낸 ‘함주지’가 전시돼 있다. 그는 1580년 ‘창산지’를 시작으로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지역마다 향토지 편찬에도힘을 쏟았다. 스스로 지역을 답사하거나 채록해 ‘동복지’, ‘관동지’, ‘영가지’, ‘평양지’, ‘함주지’ 등을 남겼다. 그중 유일하게 남은 ‘함주지’는 이후 편찬된 지방지리지의 모범이 됐다고 한다.

‘관동지’를 만들 때의 일화도 전해진다. 임진왜란으로 군무에 정신없이 바쁜 시기였으나 한강은 조금이라도 여가가 생기면 관동지방 지리지를 만들었다. 이유를 묻는 제자에게 그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완급은 다르지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겨를이 없다고 해서 놓아두고 지나칠 수는 없다. 지금 서적이 거의 다 흩어져 없어졌으니, 만약 보고 들은 것을 수습해두지 않는다면 장차 후세에 보일 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편찬한 책들이 허무하게도 한낱 재가되어 사라졌으니 생각할수록 안타까울 따름이다.

당시 영남 선비 대부분이 문도라 할 만큼 한강은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한강문인록에는 문인이 모두 342명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과거 합격자는 그 3분의 1에 달하는 110명이다. 회연서원 숭모각의 마지막에는 400명에 가까운 한강 선생 제자의 이름을 새긴 동판이 벽에 빼곡하게 붙어있다.  김광재기자 contek@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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