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國展 특선·문하생 5명 입선…경사 터진 봉강서숙
1966년 國展 특선·문하생 5명 입선…경사 터진 봉강서숙
  • 김영태
  • 승인 2019.03.11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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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파 ‘흉중유서’로 특선 수상
유공권·안진경·구양순 서체 융합
독창적인 해서체 창출의 성과
1957년 대구 첫 서실 개원 후
서당→서숙→서우회로 발전
늘어난 문하생들 작품전 개최

소헌 김만호의 예술세계를 찾아서 (12)-장년시절3.  1964(57세)~1967(60세)

◇국전, 자체(自體)로 특선

소헌 선생에게 1962년에서 1964년은 의미있는 해였다. 3회에 걸쳐 입선하는 쾌거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국전(國展)과의 첫 인연은 1962년이었다. 선생은 제11회 국전(1962)에 「안국사비문(安國寺秘文)」으로 첫 입선하였다. 이후 제12회(1963)에 「다보탑비문(多寶塔碑文)」, 13회 국전(1964)에는 안진경의 해서(楷書) 「시방곡수서」로 입선하였다. 서예계의 반응은 놀라움 자체였다. 서예계에서 해서(楷書)로 연 3회 입선한 예는 아주 드물었기 때문이다. 해서로는 누구도 소헌 선생을 따를 사람이 없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기쁨은 겹쳐서 왔다. 선생의 문하였던 권혁택(權赫澤)씨도 함께 13회 국전에 입선하였기 때문이다. 문하생에게 정성을 쏟은 결과여서 선생의 보람은 더 컸을 것이다. ‘봉강서당(鳳岡書堂)’에는 서예 동호인과 문하생이 점점 늘어났다. 그해 1964년 11월 15일에 서당의 명칭을 ‘봉강서숙(鳳岡書塾)’으로 고쳤다. 서당 이름을 변경한 이유가 동호인의 수가 늘어난 때문이기도 했지만 학문하는 자세와 마음가짐으로 더욱 정진하자는 각오를 다지기 위한 선택이기도 했다.

선생의 서도에 대한 사명감과 열정은 날로 뜨거워졌다. 그것은 ‘봉강서숙(鳳岡書塾)’을 찾는 문하생에 대한 사랑과 기대로서 응축되어 나타났다. 이 시기에 재능 있는 제자들이 잇따랐다.

“서(書)는 도(道)이지 예(藝)가 아니다. 서도(書道)를 서예(書藝)와 혼동해서는 안된다. 서예라 함은 회화적인 요소를 지닌 조형활동이지만 서도는 그것과 차원이 다른 순수정신의 계발작업인 것이다. 서도와 서예를 말 뜻으로 구분할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 ‘참 뜻’을 깨달아야 한다.” 라고 주지시켰고 기예(技藝)보다 선생이 먼저 강조하는 것은 서(書)는 곧 심화(心畵)이며 인격(人格)이라는 신념이었다. 그것은 법(書法)이기도 했다.

선생은 65년에 열린 14회 국전에도 출품해 입선했다. 구양순(歐陽詢)체로 소동파(蘇東坡)의 ‘양심잠(養心箴)’을 출품해 연4회 입선의 결실을 맺었다. 이때 문하생 여상기(呂相琪)씨도 같이 입선하여 경사가 겹쳤다. 이 시기에 선생은 한국서예가협회 정회원으로 추대되었다.

소동파의 흉중유서
소헌 선생의 1966년 국전 특선 작품 소동파의 「흉중유서(胸中有書)」

선생에게는 진료실에서의 의료진찰과 서실에서의 서도 활동이 전부였다. 66년 가을 어느 날 선생은 며칠 밤을 꼬박 작품에 전념하고 있었다. 밤하늘엔 나뭇잎 지는 소리가 살랑이고 서실(書室)의 싸늘한 밤기운은 적막감을 더해 주었지만 창을 통해 비춰주는 달빛은 서도에의 정열을 더욱 불태워 주었다. 가을밤의 적막이 붓 끝에 스며 어느새 여명(黎明)은 화선지를 붉게 물들이곤 했다. 그 환해오는 새벽을 맞으며, 선생 스스로의 글씨에도 새로운 새벽을 창조하는 산고(産苦)를 겪고 있었다. 이제까지 닦아온 필력(筆力)과 인성(人性)이 용광로처럼 끓어올라 오로지 붓 끝에 그 모든 것을 농축시켜 한 점(点) 한 획(劃)의 선생의 분신(分身)이 하나의 서체(書體)로 만들어 지고 있었다. 유공권(柳公權), 안진경(安眞卿), 구양순(歐陽詢)의 서체가 하나로 융합되고 육조(六朝)의 필법(筆法)이 가미된 선생만의 독창적 해서체(楷書體)가 창출된 것이다. 법고창신(法古創新)의 결과라고나 할까, 소헌 선생은 스스로의 자체(自體)로 소동파(蘇東坡)의 ‘흉중유서(胸中有書)’를 써 나갔다. 큰 산고(産苦)는 큰 보람을 낳게 마련이다. 이 작품이 15회 국전의 특선 수상 작품이다. 국전에 연이어 5회 입상하여 끝내 특선을 한 것이다. 뼈를 깎는 정진이 익어가는 벼이삭 마냥 알알이 보람의 열매를 맺은 것이다.

더 큰 보람은 이번 15회 국전에서 ‘봉강서숙’의 문하생 5명이 입선한 것이다. 권혁택(權赫澤), 김석환(金碩煥), 여상기(呂相琪), 신점순(申点順), 류영희(柳永喜) 씨이다. 선생과 함께 문하생 5명이 입상했으니 ‘봉강서숙’에서는 경사가 났다.

당시 대구일보 문화면(1966.10.21)에는 「제15회 국전 서예부문에서 경북이 파격적인 다수가 입선되어서예가들 사이에 화제가 되고 있다. 예년에 경북에서는 한 해 3~4명이 겨우 입선할 정도였는데 이번에는 특선과 함께 입선이 11명이나 되었다. 입선자 중에는 여자도 4명이나 된다. 특히 봉강서숙에서는 특선된 소헌 김만호와 추강 김응섭 씨를 비롯해서 5명의 입선자를 내어 축제 분위기에 들떠 있다. 입상자 명단과 작품명은 다음과 같다. <후략>」 라는 기사와 함께 소헌 선생의 특선 작품 ‘흉중유서’ 사진을 실어 크게 보도했다.

그러나 그 영광은 선생에게 만족을 주지는 못했다. 오히려 수확 뒤의 들판에 서 있는 듯 어딘가 모르는 아쉬움이 선생을 허전하게 했다.

“내 글씨, 60평생을 써온 나의 글씨! 그러나 아직 멀었다. 서도(書道) 그것은 너무나도 아득하고 험한 유현(幽玄)의 가시밭길이다. 그토록 내 살아 뛰는 정신(精神)과 생명(生命)을 불어 넣으려 했건만, 그 결과가 기껏 저 것이란 말인가, 만족하기에 너무나도 아쉽고 한스럽구나. 다시 찾아 나서야 한다. 구도(求道)에는 원래가 끝이 없는 법이다. 내 글씨에서 ‘아쉬운 그 무엇’ 그것을 찾아서 자 다시 떠나가자” 선생은 옷깃을 여미고 다시 굳건히 붓(筆)을 잡고 먹(默)을 갈면서 “내 작품은 바로 내 자신이다. 나의 정신이고 생명이다. 마음의 밭을 더욱 갈아야 한다”라고 비망록에 기록했다.

이 때 선생은 해동서화협회 부회장으로 피선되었고, 그해 66년 8월 29일에 차남인 영수(榮秀)가 독일 뮌헨대학에 유학을 떠났다. 당시는 해외 유학이 몹시 힘들었던 시대였다. 서울 김포공항에서 선생과 함께 온가족이 전송(錢送)하던 그 때 비행기가 이륙하던 광경이 필자의 기억에도 또렷하다.

67년 제16회 국전에는 조맹부체로 해서(楷書) 「관음전기(觀音殿記」를 출품하여 입선 하였다. 이때 어린 문하생 장옥분(張玉粉)양도 입선하여 선생의 기쁨이 컸다.

◇봉강서우회

서실을 개원(1957)하고 1963년에 발족한 ‘봉강서당(鳳岡書堂)’은 찾아오는 동호인이 늘어나면서 1964년에 이름을 ‘봉강서숙(鳳岡書塾)’으로 개칭했었다. 1967년 12월 10일에 서기원(徐起源), 정 화(鄭 華), 김동섭(金東燮)씨를 고문으로 영입하고 ‘봉강서숙(鳳岡書塾)’을 ‘봉강서우회(鳳岡書友會)’로 명칭을 바꾸어 서예 서클로 발전시켰다. 이같이 ‘서숙’을 ‘서우회’로 성격이 바뀌게 된 것은 문하생들의 의견을 받아들인 때문이다. 서숙은 학원 성격을 띠고 있으므로 본격적인 서클로 변신하면서 새로운 변모를 꾀하자는 것이었다. 또한 이듬해부터 회원작품전을 열기로 결정하였다.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여러사람에게 보임으로서 우리 모임의 목표와 뜻을 사회에 알리고 서도에의 관심을 높임과 동시에 또 그들의 평(評)을 들어 그것을 바탕으로 더욱 정진하자는 뜻이었다.
 

봉강서우회계첩서
「봉강서우회계첩서(鳳岡書友會契帖書)」, 김동섭 선생이 짓고 썼다(1967)

봉강서우회의 고문인 문소 김동섭 선생은 다음과 같은 계첩서(契帖書)를 썼다(1967).

「봉강서우회계첩서(鳳岡書友會契帖書)

전하는 말에 따르면 사람은 한가지 능함이 있으나 어찌 그것이 저절로 능해 지겠는가. 진실로 굳게 천착하고 왕희지(王羲之), 구양순(歐陽詢), 유공권(柳公權) 등은 일생동안 심력을 다하여 그에 이르렀고 우리나라에서는 한 호(韓濩), 김정희(金正喜) 등이 깊은 얻음이 있었다. 옛 분들의 유명한 서체가 지금은 서첩(書帖)으로 남아 있는데 봉강서우회(鳳岡書友會) 또한 감흥이 있으니 휘호(揮毫)함에 있어서 누에 머리에 말의 발굽같고 봉황이 날고 뛰는 것 같으며 철선과 갈고리 같이 한겨울의 마른나무 같아 이목을 현란케 한다 <중략> 마음이 통하는 벗 여상기(呂相琪), 권혁택(權赫澤)이 큰 책임을 나에게 맡기고 계첩서(契帖書)를 만들라고 하나, 평상시 상도(相徒)의 의(義)로 돌아보니 재주가 없고 식견도 없어 감당키 어려울 따름이라. 비록 그러하나 옛 사람의 말씀에 경망한 사람의 말도 성인이 택할 것이 있다고 했으니 분수에 넘치는 글을 삼가 쓴 죄를 제현께서 용서하기 바라며 시작과 끝을 맺는 바이다.

청용지세(靑龍之歲) 부양월(復陽月) 하한(下澣), 문소(聞韶) 김동섭(金東燮) 서(序)」

김영태 영남대 명예교수(공학박사,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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