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다 핀 청년 시인…그림처럼 생생한 문학세계로의 초대
못다 핀 청년 시인…그림처럼 생생한 문학세계로의 초대
  • 김광재
  • 승인 2019.03.14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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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문학관
2017년 경기도 광명에 개관
성장기 소개하는 ‘유년의 윗목’
대학시절 담은 ‘은백양의 숲’ 등
삶의 궤적 따라 주요작품 전시
안개의방
개관 1주년 기념전시 노동식 작 ‘시 한 컷-안개의 방’.

그가 “시인들만 우글거리는 신비한 도시”라고 했던 대구에서 그의 새집 ‘기형도 문학관’이 있는 광명까지는 1시간 40분쯤 걸렸다. 문학관은 걸어도 20분이 채 걸리지 않을 거리에 있었는데, 꽃샘추위로 바람이 매워 버스를 타고 갔다. 반듯한 건물이 오전의 햇살을 등지고 앉아있었다. 건물 옆에는 ‘빈 집’과 ‘엄마 생각’이 새겨진 석판, 그의 웃는 모습과 육필 원고가 프린트된 타일이 4폭 병풍처럼 서 있다.

시인 기형도(1960~1989)는 연평도에서 태어나 4살 때 시흥군 소하리(현재 광명시)로 왔다. 그가 유년 시절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던 집은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기 전에 직접 지은 것이다. “사위어 가는 호롱불 주위로 방안 가득 풀풀 수십 장 입김이 날리던”(「바람의 집-겨울 판화1」) 외풍이 심한 집이었으며, 그가 “찬밥처럼 방에 담겨” 저물어도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며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엄마 걱정」) 집이었다. 그 집은 2005년에 헐렸다고 한다.
 

시벽
전시관 외부의 시벽.

2017년 11월 기형도 문학관이 개관했다. ‘바람의 집’이 있던 자리에서 2㎞ 떨어진 곳에 새집이 마련된 것이다. 그의 시와 유품,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모여들어, 새집은 그에 대한 추억으로 채워졌다. 그는 생전에 「추억에 대한 경멸」이라는 시를 쓰기도 했지만, 이 추억의 집에 대해선 계면쩍은 듯 시익 웃고 말 것이다. 이 추억은 그의 것이 아니라 남은 사람들의 것이니까.

글 쓰는 사람의 유품이라야 그리 특별한 게 있기 어렵고, 더구나 스물아홉 생일을 엿새 앞두고 세상을 떠난 시인이니 더욱 그럴 것이다. 그가 쓰던 만년필, 노트, 탁상시계, ‘국민학교’ 반장 임명장, 상장, 성적표, 그의 글이 실린 잡지, 사진 그리고 그가 입던 양복도 한 벌 걸려 있다. 장례 후 망자의 옷을 태울 때, 시인의 어머니가 나중에 관에 넣어가려고 따로 간직해 둔 것을 문학관에 내놓은 것이라 한다.

 

빈집
대표작 ‘빈집’을 형상화한 공간.

그의 가장 중요한 유품은 30년이 흐른 지금도 독자들로부터 사랑받는 시일 것이다. 기형도 문학관 1층 전시실은 주요 작품들을 그의 삶의 궤적을 따라 읽어볼 수 있도록 구성해 놓았다. 성장기를 소개하는 ‘유년의 윗목’, 대학 시절을 담은 ‘은백양의 숲’, 등단 후 문단활동과 기자로서의 일상을 보여주는 ‘저녁 정거장’ 등 세 부분으로 나눠, 관련 작품들과 함께 당시를 떠올릴 수 있는 유품을 전시하고 있다.

그리고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안개’를 텍스트 애니메이션과 영상으로 보여주는 코너와, 가장 사랑받는 작품 ‘빈집’을 형상화한 공간도 마련돼 있다. 골목처럼 이어지는 전시공간을 빠져나오면, 정현종, 성석제, 나희덕 등 그와 알고 지냈던 사람들이 들려주는 기형도에 대한 추억을 영상으로 보여준다. 또 강성은, 김행숙, 오은, 최하연 등 후배 시인들이 그의 시를 낭송하는 ‘시인들, 기형도를 읽다’ 코너도 있다.

 

저녁정거장
‘저녁 정거장’. 그의 작품이 실린 잡지들과 양복이 전시돼 있다.

지난해 10월 30일 개막된 개관 1주년 기획전시도 오는 5월 31일까지 이어진다. 솜을 재료를 사용해 작업하고 있는 현대미술작가 노동식의 ‘기억나무’와 ‘시 한 컷-안개의 방’이 전시되고 있다. 1층 로비에 설치된 ‘기억나무’는 솜으로 만든 나무가 관람객들이 남겨놓은 엽서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작품이다. ‘시 한 컷-안개의 방’은 2층 북카페의 작은 방에 등단작 ‘안개’ 텍스트와 그 배경이 된 70년대 이 지역의 모습을 형상화해 보여주는 작품이다.

2층 도서공간에는 기형도 시집과 전집을 포함해 많은 책이 서가에 빼곡이 꽂혀있다. 그의 첫시집이자 유고시집인 ‘입 속의 검은 잎’을 펼쳐보니, ‘1989년 5월 30일 초판 1쇄 발행, 1993년 12월 10일 초판 24쇄 발행, 1994년 2월 20일 재판 1쇄 발행, 2017년 10월 13일 재판 59쇄 발행’이라고 적혀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중 가장 많이 팔린 시집이다. 그러니 기형도문학관이 개관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관람객 2만명을 넘긴 것도 이상할 게 없다. 그중에는 자신의 삶 어느 중요한 시점에 기형도를 만나, 질투를 느꼈거나, 위로를 받았거나, 상처가 덧났거나, 혹은 지금도 그러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기형도 문학관은 그가 정서한 육필 원고처럼 반듯했다. 깔끔하고 용의주도하면서도 따뜻한 느낌을 주는 공간이다. 바깥에는 드센 바람이 불고 있었으나 기형도의 새집은 따스하고 조용했다. 기형도문학관 뒤편에는 기형도문화공원이 조성돼 있다. 공원 바로 옆으로 난 제2경인고속도로 위로 자동차들은 무심히 달리고 있었다. 돌에 새겨진 그의 시와 키 큰 자작나무가 그 소음 속에서 하얗게 서 있었다.

 

기형도문학관
기형도문학관.

*기형도문학관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관람할 수 있고, 11~2월은 오후 5시까지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다. www.kihyungdo.co.kr 02-2621-8860

김광재기자 contek@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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