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듯 다른 色色의 마법
같은 듯 다른 色色의 마법
  • 서영옥
  • 승인 2019.03.18 2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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紅·靑·黃·綠 4가지 색 사용
한 가지 색을 써도
명도 채도 따라 느낌 천차만별
캔버스에 물감 쌓는 색면 회화
혼합색 중심으로 보이는 정면
측면서 보면 기본색 포착 가능
을갤러리_김승현7
김승현 전시가 열리고 있는 을갤러리 전경.

 

서영옥이 만난 작가, 김승현 

붓 자국 속의 물감들이 균등하게 혼색되어 있다. 녹색인가 싶어 다가가서 보니 적색 가닥들이 제 본색을 엷게 드러낸다. 넓은 단위의 지배색은 여러 가지 색들이 겹겹이 축적되어 탄생한 혼합색이다. 이를테면 붉은 빛이 감도는 녹색이라든가 푸른빛이 도는 붉은색이 그렇다. 분리된 터치의 병치로 혼색을 산출한 인상파 화가들의 표현방식과는 상반된다. 점묘파 화가들이 안료를 섞음으로써 생겨나는 채도의 감소현상을 피했다면, 김승현은 파레트가 아닌 캔버스 위에서 순차적으로 펴 올린 색으로 감소되는 채도를 운용한다.

그간 전시를 “안 하기도 하고 못하기도 했다”는 김승현의 솔직한 고백을 정리하면 이렇다. 현재(2019년 3월 12일~4월 13일) 을 갤러리(EUL GALLERY-대구 남구 이천로 134)에서 전시 중인 김승현은 50대 초반의 작가이다. 이번 초대전이 5회 개인전이지만 화단에 입문한 것은 22년(1997년) 전이다. 화상들의 주문에 응하는 삶은 버렸다. 발표에 신중했을 뿐 작업은 꾸준했다. 힘든 순간에도 붓은 들었다. 그렇게 축적된 대작들이 상당하다. 미술평론가 윤진섭은 “그의 작업실을 방문하였을 때 나는 대작 위주의 작품들을 둘러보면서 그림에 대한 내공이 상당함을 느꼈고…(중략)…분야는 다르지만 동양화의 사의(寫意)에 비견될 수 있는 차원이다”라고 했다.

김승현이 단색화를 시작한 것은 2007년부터다. 화단에 입문한 1997년부터 단순한 경향의 작업을 시도했고 2007년부터는 캔버스 위에서 물감을 중첩시키는 작업방식을 고수한다. 바닥에 눕혀놓은 캔버스 위에 넓은 붓으로 아크릴 물감을 10여 차례 중첩하여 발색시킨 최종 색은 밑 색이 우러나온 혼색이다. 색의 상충효과로 잉태된 혼색은 주도적 색조(leading tones)가 다른 기본 색을 지배하고 있다. 이를테면 청색성(blueness)과 황색성(yellowness)처럼 기본색상이 결여된 상태이다. 기본색의 병치로는 강한 생동감과 활기를 기대할 수 있지만 축척은 그 반대의 효과를 노릴 수 있다. 엄격하게 보면 김승현의 혼색은 기본색이 융합된 별색(別色)이며 감산혼색(減算混色 subtractive mixture)인 셈이다.

 

 


괴테는 색이 황색과 청색, 두 대표 색의 간극을 유지한다고 했다. 이때 황색은 빛에 가까운 색이며 청색은 어느 정도의 어둡기를 지닌 색이다. 김승현이 운용하는 색도 이 두 색군 사이에 존재하는 빨간색과 파란색, 노란색, 녹색이다. 색채학에서는 빨강과 파랑, 노랑을 순수 색으로 분류한다. 녹색은 혼색과 단색 사이에서 의견이 엇갈린다. 순수색은 더 이상 분해될 수 없는 기본색이란 뜻이다. 이들 기본색들은 독립적이다. 서로 간에 구별되는 색료들을 한데에 포개면 긴장감이 감소된다. 색광(色光)과는 달리 색료(色料)의 혼합은 자기 고유색을 지키지 못하고 서로의 색감을 상쇄시키기 때문이다.

예술에서 색은 과학에서 증명한 색의 의미보다 그 범위가 훨씬 넓다. 한 가지 색상이라 하더라도 면적과 명도, 채도에 따라서 전달되는 색의 느낌은 다르다. 두 가지 색이 병치되거나 축적되면 기준점은 더욱 모호해진다. 입체적인 형과 달리 평면적인 성질을 지닌 색은 정서적이고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색은 주변 환경에도 영향을 받는다. 바로 김승현의 회화가 그렇다. 김승현은 형이 없는 색만으로 작업한다. “왜일까요?” 한 관람객이 작가에게 묻자 작가는 “작업은 자기에게 맞는 것을 하는 것이며, 그것은 아마도 내 안에 내재된 DNA 때문일 겁니다.”라고 했다. 말맛이 회화의 색 맛에 못 미치던 김승현 작가는 말로 예술을 풀어내려 하지 않는다. 한쪽이 하강하거나 상승하지 않도록 균형을 유지하려는 신조가 굳건하다. 파도의 높낮이에 이유를 달지 않듯 작가에게 창작은 그저 일어날 뿐이다. 김승현 작가에게도 회화는 보여주는 기능 이상의 심연으로 접어드는 발판이다. 그의 예술관이 읽혀지는 대목이다.

김승현의 회화를 이해할만한 뚜렷한 단서는 나이테처럼 쌓인 물감의 단층밖에 없다. 작품 속에 투영된 투지도 추가된다. 작가의 투지는 그가 어떻게 작업에 임하는지를 주목하게 한다. 김승현 작가에게 잠식한 DNA는 조형요소들 중 유일하게 색을 불러들였다. 색의 정점을 찾아가는 과정에는 고된 노동이 수반된다. 수공을 간과할 수 없는 이유이다. 캔버스에 칠한 색이 마르기 전과 후의 느낌도 달라 일조량이 많은 여름에도 두 가지 색 이상을 겹쳐 올리지 못한다. 기후와 시간의 제약이 뒤따르는 작업이다. 게다가 욕심이 더해지면 기대치를 벗어나게 되니 긴장감과 몰입도 필수다.

중첩된 색이 무채색으로 기울 때 색의 감정(또는 사유)은 안정감을 유지하기 쉽다. 김승현의 회화에서 중첩된 색도 마찬가지다. 작가는 관람자에게 작품 감상을 맡기면서도 “편안하기를 바란다”는 작은 바람을 내비쳤다. 중첩된 색이 캔버스라는 한정된 범위 에서는 고립되어 있지만 깊이를 찾아들면 척력(斥力)보다 인력(引力)에 가깝다. 넓은 붓 길이 단숨에 휩쓸고 지나면서 남긴 단조로운 면은 상호 충돌을 피하며 경계점도 지운다. 이러한 김승현의 회화를 정면에서만 바라보면 감상의 반을 놓치게 된다. 어떤 색이 제시될 때 우리의 눈은 본래의 색을 환기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저변에 흐르는 기본 색에 대한 기대치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지배색이 탄생되는 과정에서 희생된(또는 헌신한) 기본색이 포착되는 곳은 캔버스의 측면이다. 측면에는 정면에서 발각되지 않은 기본색의 순수성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본질과 진실 같은 기본색은 이질감을 일으키지 않고 작품 전체의 이해를 돕는 감식안을 깨우는데 일조한다.

큰 채움과 같은 공간을 형성하는 김승현의 회화에서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색 뿐이다.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지 않을 때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더 늘어난다. 있다고 해도 본래 있는 색이 아니고 없다고 해도 원래 없는 색이 아닌 색을 보게 된다. 삶과 죽음 같은 상대적인 인식을 흡수한 색이기 때문이다.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示空空卽示色)을 화두로 삼고 자신의 참 모습을 찾아가는 수도자의 숨결 같은 색이다. 표면적인 차이만 보고 판단할 수 없는 세상 이치와도 같은 색이다. 진리를 깨닫고자 고군분투하는 구도자의 기개와 같은 색이다. 김승현 작가가 구현한 색이 그렇다. 순수하고 용맹스럽다. 그 색의 층위를 파헤쳐보면 고독이 납작하게 눌러져있지 않을까. 알 수 없는 자기 거부와 곤궁을 이겨낸 기쁨에 더한 삶의 소소한 떨림도 함께 스며있을 것이다. 검객의 칼날처럼 날카롭게 내리 꽂은 예리한 통찰도 얼비친다. 정신과 행위의 총합이 일구어낸 김승현의 색면은 대지이자 하늘의 색이며 핍과 허기의 지점, 그리고 나라는 존재가 소멸해버리는 지점의 색이다.

아쉬움은 남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밀도감을 유지하는 김승현의 회화는 정신과 몸을 휘돌아 나온 색의 전부이다. 색의 포만감에 안주하지 않으려는 작가의 노력으로 조율된 색이 다양한 경계를 넘는다. 그것이 아득한 현의 느낌으로 다가온다. 지금까지 접하지 못한 불모의 영역은 아니지만 서구에서 이식된 모더니즘적 예술 양식에 빚지고 있다는 속단을 보류하게 된다. 김승현의 회화는 언어로는 닿지 못할 어딘가로 향하는 삶의 지점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미술학박사 shunna9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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