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 해프닝
전시장 해프닝
  • 승인 2019.03.19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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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봉조 수필가
오랜만에 김밥을 싸고, 구수한 보이차를 준비했다. 아는 언니와 공원 산책을 하며, 그간의 안부와 건강을 확인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만나자마자 계획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옇게 내려앉은 미세먼지에 어디가 산이며 어디가 하늘인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시야가 흐리고, 목이 칼칼해지는 것을 느꼈던 탓이다.

주변이 공원으로 둘러싸인 그곳에는 예술 작품을 전시하고 문화 공연도 하는, 전시관 건물이 있었다. 1층은 전시가 진행 중이었다. 우리는 2층으로 올라가 전시 준비를 위해 비워둔 전시장 앞 로비의 의자에 앉아 김밥과 후식 등을 나눠먹고, 두런두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소화도 시킬 겸 작품 구경을 하기로 했다.

제1전시실부터 제3전시실까지는 사람과 관련된 작품 40여 점이 전시되고 있었다. 그림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사람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어서 쉽게 공감할 수 있었다. 어떤 작품 앞에서는 한참이나 서서 ‘이런 부분까지 어떻게 표현했을까?’ 싶어 깊은 감동과 그림 그리는 장면을 연상해보았다. 또 다른 작품 앞에서는 작품의 제목과 연관된 불경의 구절을 인용해 성심껏 해설해주는 언니의 언변에 감탄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제4전시실에서는 재미 여류 서양화가의 작품 전시를 위한 개막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전시장 입구에는 3단짜리 화환 두 개가 나란히 서 있고, 아래쪽으로 자그마한 화분들이 축하 리본을 단 채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축하객들은 친지와 여고동창, 종교계 지인 등으로 행사가 제법 무르익어 동년배 기타리스트의 연주와 흥겨운 노랫소리도 들려왔다.

포스터에는, 팔순이 지난 화가가 1970년대 대한민국 국전을 거쳐 1980년대 이후 미국 등 해외에서 활동을 하면서 많은 수상과 다양한 개인전 및 단체전 등 화려한 경력이 기재되어 있었다.

우리가 전시장 앞에서 멀찍이 보이는 작품들의 화려한 색감과 추상적인 정물 등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어깨가 약간 구부정하면서도 부리부리한 눈빛과 짧은 은발이 인상적인 화가가 뒷짐을 진 채 입구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화가가 기다렸던 여고 동창회의 화환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화가는 그 자리에서 불같은 화를 내기 시작했다. 동창생으로 보이는 참석자들 앞에서 ‘이게 말이 되느냐’고 따지듯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예상 밖의 상황에 당황한 참석자들은 삼삼오오 눈짓을 주고받으며 대책을 논의하는 듯했고, 누군가 밖으로 나와 조용히 전화를 하는 것 같았다.

들리는 말로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유수 여고 출신들이었다. 화가 날 만도 하겠다 싶었다. 나름대로 국위를 선양하고, 출신학교에 대한 자부심 또한 대단했을 것이다. 그리고 멀리 미국에서 고국을 찾아와 전시회를 한다는데, 축하의 뜻이 담긴 화환이 도착하지 않았으니….

섭섭한 마음은 서너 번만으로도 충분히 전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봇물 터지듯 터져버린 감정이 쉽게 수그러들지 못하고 자리를 옮겨가며 같은 말을 반복하니, 주변에서 듣는 제3자의 입장에서도 기분이 썩 좋지는 못했다. 더불어 들떠있던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싸늘해지고, 우리는 전시장에 발을 들이지도 못한 채 아쉽고 불편한 마음으로 돌아왔다.

만약 실수로 빚어진 일이라면 만회의 기회를 주어야 할 것이다. 자초지종 알아보지 않고 화부터 내는 것은, 실수보다 더 큰 우(愚)를 범하는 일이다. ‘존경 받고 싶으면 말을 너무 많이 하지마라’는 어느 나라의 속담이 있다. 존경이나 축하는 받을 사람의 기대보다는 하는 사람의 마음에서 우러나야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한참이 지난 후에도 자꾸 그날의 풍경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던 동창생들의 아련한 몸짓 때문일 것이다. 화환이 무엇이기에, 축하를 하러 온 수고는 간 곳 없고 억울한 지청구만 듣고 돌아가는지….

어떤 전시장에서는 ‘화환을 정중히 사양합니다.’라는 알림 문구를 본 기억이 있다. 주변이 깨끗하여 작품에 집중할 수 있고, 낭비와 부담을 줄이는 현명한 일이라 생각한다.

만물이 기지개를 켜는 나른하고 포근한 봄날, 우리들의 마음 한 자락에도 훈훈한 이해와 양보의 미덕이 자리를 잡을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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