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린 북’을 보며 존엄성 보듬는 세상에 대하여
영화 ‘그린 북’을 보며 존엄성 보듬는 세상에 대하여
  • 승인 2019.03.28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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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선 대구교육대학교 대학원 아동문학 전공 강사
늘 눈은 흰색이라고만 여겼던 편견 앞에 외신에서 비추던 러시아 탄광촌의 검은 눈 풍경은 충격이었다. 순간, 게스탈트 심리학에서 어느 쪽을 유표화 대상으로 보는가에 대한 논리를 뒷받침하던 그림 한 장이 겹쳐보였다. 하얀 도화지 가운데 까만 꽃병을 집중해서 보면 양쪽 가장자리에서 마주보는 두 여자의 옆얼굴은 배경이 되는 주체의 결의(決意)말이다.

1월에 본 영화 ‘그린 북(Green Book)’이 생각났다. 까만 꽃병처럼 고혹적인 흑인을 중심에 놓고 보게 하는 영화였다. Green Book은 흑인이 투숙할 수 있는 호텔과 레스토랑을 소개한(1936년부터 1967년 까지 판매 되던) 책자의 이름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I have a dream’으로 시작하는 연설을 하던 1963년, 인종차별이 심하던 그 시기 천재성을 인정받고 있는 흑인 피아니스트 ‘돈 셀리’가 뉴욕에서 출발하여 인종차별이 가장 심했던 조지아 주까지 연주 여행을 하며 겪는 인종차별의 실화를 각색하여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 작품상, 각본상, 남우조연상까지 차지한 영화다.

주인공 ‘돈 셀리’는 워싱턴 레닌그라드음악학교에서 공부하며 19세 때 런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한 천재성을 인정받는 연주가로서 각 도시마다 초청 연주회를 떠나지만 그는 흑인이라는 편견의 국경을 뛰어넘지 못한다. 운전기사 겸 보디가드로 고용한 백인 ‘토니 립’은 호텔에서 식사를 하지만 그가 모시는 ‘돈 셀리’는 호텔 화장실 사용마저도 금지되고 호텔 밖 흑인 전용 식당으로 쫓겨난다. 양복을 살 때도 흑인은 입어보지 못하게 하는 등 백인 우월주의 때문에 갖은 수모를 겪는 ‘돈 셀리’는 잘 참아낸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도 그의 마음이 되어 울분을 참으면서 보았다. 오히려 보디가드로 나선 ‘토니 립’이 ‘돈 셀리’를 흑인이라 부당하게 트집 잡는 백인 경찰에게 흑인 편들기로 대들다가 철창신세가 될 때, 나는 그 위에, 겹쳐 보이는 얼굴들을 만났다.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 징용 문제의 해결을 위해 자기 나라의 책임을 일깨우는 일본인들, 장애인이나 청소년의 인권을 위해 나서는 사람들, 우리나라를 찾아온 난민을 감싸주던 사람 향기 나는 얼굴들! ‘어떤 경우에라도 존중받아야만 할 당신은 바로 나다!’는 공감으로 인권을 중히 여기는 마땅한 온정들의 향기였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것은 ‘흑인은 고상한 클래식을 연주해서는 안 된다’는 백인 우월주의사회의 편견이었다. 클래식을 연주하고 싶은 그의 욕망과 열정까지 표현하지 못하게 제한하여 결국, 팝 뮤직 피아니스트로 머물게 한 사실이 그 시대, 미국사회의 흑인에 대한 관습이었다니! 원주민을 평화로운 삶의 터전에서 총으로 몰아내고 흑인을 노예로 부리던 그들의 역사를 돌아본다면, 오히려 그들은 몹시 부끄러워할 권리에 충실해야 한다. 그 권리에 따른 역사와 사회에 빚을 진 유표(有標)에 관심 두고 겸손해져야 한다.

요컨대 미국에서 ‘하얗다’는 것은 무표(無標)다. 실제 ‘백인’이라는 분류는 없다. 다만, 유표(有標)로 흑인(까맣다는)을 뜻한다고 한다. 거기에 황인이든 흑인이든 유색 피부가 죄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일까? ‘돈 셀리’가 모욕감을 느끼게 하는 취급을 해서는 안 되는 인간 본연의 존엄성에 집중해야 한다. 결국 ‘돈 셀리’는 재즈로 1960년대 ‘돈 셀리 트리오’ 재즈 그룹을 결성, 베스트셀러 음반 탑40에 들면서 ‘존엄과 고결함을 지닌 흑인의 음악적 경험, 그것만이 내가 염원하는 일’이라며 뼈아픈 고백을 했다.

현재 미국에서는 취업을 위한 이력서 제출 시 나이나 인종에 대한 정보도 기재하지 않게 하고 사진도 안 붙이게 한다는데 미국사회가 이렇게 변화하기까지는 ‘토니 립’처럼 의식 있는 백인들의 인간애가 바탕이 되었을 테고, 그 위에 미 남부 인종 분리정책에 맞서 1년 넘게 버스 승차 거부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위시하여 자기 존엄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투쟁해온 많은 영혼들이 인고의 시간을 견뎌내어 온 덕택일 것이다. ‘돈 셀리’와 ‘토니 립’은 2013년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우정을 이어갔다. 편견의 긴 터널을 헤쳐나간 고결한 우정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주제는 인종차별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삶에서 다양한 형태의 삶을 사는 타인을 존엄성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함부로 무시하거나 소홀히 대하고 엽신여기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게 하는 영화였다. ‘어떤 경우에라도 존중받아야만 할 당신은 바로 나다!’는 공감으로 인권을 중히 여기는 ‘사람 향기 가득한 세상’이기를 꿈꿔본다. 꿈을 믿으며 나에게도 묻는다. ‘내 삶에서 편견으로 사람을 함부로 무시하거나 소홀해하거나 업신여기는 죄를 짓지 않으려면 어떻게 사는 일이 인간답게 사는 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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