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논단> 공론(公論)
<대구논단> 공론(公論)
  • 승인 2010.03.07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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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홍 (대구대 역사교육과 교수)

어떤 단체에서 의사를 결정할 때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다수의 여론이다. 다수 여론에 따라 일의 방법과 순위가 결정된다. 민주주의에서 소수의 의견도 존중되어야 하지만 다수결은 어떻게 보면 피할 수 없는 결정 방법인 것 같다. 그러나 다수가 여론을 만드는데 있어서 그 방식이 각종 친분이나, 잘못된 여론을 통한다면 그 결정은 문제가 있다. 그래서 공정한 여론을 형성하는 언로(言路)가 중요하다.

조선시대에는 어느 시대보다 언로가 발달되었고, 열려 있었다. 조선시대 정치권력은 왕의 일인지배로 보이지만 상호 견제와 공생이라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왕 아래에 있는 의정부는 영의정·좌의정·우의정으로 구성되어 왕의 정책을 자문하고, 3정승들은 정책을 상호 합의하는 기구다. 왕이 모든 정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3정승의 자문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실무를 보는 6조가 있다. 6조는 행정, 재정, 교육, 군사, 법률, 토목공사 등 국가의 전반적인 일을 담당한다. 그러나 문제는 의정부와 6조를 담당하는 일부 사람들이 정치적인 사건에 대하여 일방적으로 독점할 때이다. 국왕의 일방적인 결단과 특정한 세력이 권력을 독점할 경우가 문제가 된다. 이 경우는 반대 의견을 제시할 방법이 없어진다. 모든 정치는 다양한 의견들이 모여 논의가 되어야 한다.

조선시대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만든 기구가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3사이다. 이것은 의정부-6조의 소속이 아닌 독립적인 기구이다. 사헌부는 언론활동과 여러 관리에 대한 규찰과 탄핵을 담당한다. 여러 관리들을 규찰하기 때문에 기구내의 상하 관원의 예의와 의식이 엄격하고, 기강이 엄한 것이 특징이다. 사간원은 왕의 잘못된 것에 대하여 호소하거나 논박하는 기구이다.

관원은 내외의 4조(4祖)안에 흠이 없어야 하며, 강직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담당한다. 사헌부가 기구 내 상하관계가 엄격하였다면, 사간원은 기구의 성격상 위험부담이 커 상하관의 예의를 그리 많이 따지지 않으며, 직무 중 술을 취하도록 마셔도 문책되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관리들이 출퇴근이 엄격하다면, 사간원은 출퇴근이 자유롭다. 홍문관은 왕을 대신하여 글을 짓거나 왕의 정책에 대하여 자문하는 역할을 한다. 왕의 필요에 따라 역할의 변화가 가장 심한 기구이다.

이러한 기구가 완성되는 시기는 성종 9년(1478) 홍문관이 만들어지면서다.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낸 계유정란 이후 이른바 훈구파들이 득세하였다. 이후 훈구파들은 연이은 공신 책봉으로 의정부와 6조의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한편 많은 토지를 차지하였다. 정치가 훈구파들에 의하여 좌지우지되는 상황이었다. 이에 성종은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하여 지방의 재지사족들을 적극 등용하는데 이들을 사림파라고 한다.

사림파들은 특히 언론 기관인 3사를 중심으로 포진하였다. 이들이 중시한 것이 공론, 즉 공적인 정치 여론이다. 정치 현안을 밀실에서 일부 사람들에 의하여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관리(혹은 양반)들 대부분의 공적인 여론을 통하여 결정하자는 것이다. 사림들은 훈구세력들이 남의 토지를 빼앗거나 윤리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이에 훈구들은 자신의 권력을 놓치지 않기 위하여 사림들을 각종 사유를 들어 공격하여 관직을 뺏고, 귀양을 보내거나 죽였다. 이 4번의 사화(士禍)를 거치면서 사림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꾸준히 주장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후임을 자신이 추천하는 제도를 정착시킴으로서 결국 훈구를 몰아내고 정치를 장악하였다.

그러나 이들 역시 정치권력과 경제를 장악하자 문제가 생겼다. 처음의 그 순수성은 자신들만이 옳다는 생각으로 변화되면서 왕과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왕이 자신의 생각과 다를 때 3사는 이유를 불문하고 왕이 제시한 안건을 반대하였다. 들어주지 않을 때는 관직을 버리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사림들은 공론을 이유로 들어 왕의 의지를 꺾었다. 여론을 장악하여 스스로 공론을 만들어갔다.

그리고 자신들이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자 다른 당의 의견을 인정하는 `붕당(朋黨)’이 `당쟁(黨爭)’으로 성격이 변하여 자신들만 옳다고 생각하였다. 결국 의정부와 6조, 3사를 자기 당파 사람들만으로 구성하면서, 자신들에게 공론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공론은 조선의 일부 권력 양반들의 여론일 뿐이다.

그러면서 백성들의 이야기는 듣지 않았다. 지금 방문진 이사진과 MBC 사장을 교체하였다. 이것이 정부는 언론을 장악하여 공론으로 포장하려는 의도는 없는가? 이들이 포장된 공론을 이유로 들어 각종 정치현안을 자기편의대로 조작하지 않을 것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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